청명한 하늘 아래 어른과 아이가 빨강, 파랑 조끼를 입고 줄을 맞춰 서있다. 그럴듯하게 식순을 갖춰 개회사를 시작으로 준비 체조를 한다. 예상치 못한 국민체조 음악에 어른들은 피식하더니 요즘도 하냐며 놀라면서도 금세 일사불란하게 준비 체조를 한다. 아이들은 이상하고 요상한 노래에 맞춰 엄마, 아빠가 준비체조를 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면서도 눈치껏 진지하게 동작을 따라 한다.
아이가 5세 때 참여했던 유치원 운동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가족 운동회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년 후인 7세에 다시 가족 운동회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 해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라는 바이러스로 운동회가 취소되었다. 그 이후에는 코로나19가 창궐했으니 운동회는커녕 모임마저도 어렵던 시절을 겪었다. 열정 가득했던 우리 4 가족은 항상 취소된 운동회를 아쉬워했고, 언제 또다시 재미난 이벤트가 있을까 궁금해했다.
"유치원 운동회 진짜 재미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진짜 웃겨. 우리 달리기 순서 기다린다고 쪼그려 앉아 있을 때 처음 인사했잖아."
"맞아. 처음 봤으면서 둘째 가질 거냐고 묻고."
5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5일 전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기억해서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똑같은 부분에서 박장대소하는 우리는 아이들 유치원에서 만난 가족 모임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친해서 엄마들이 친해졌다가 지금은 아빠들도 같이 모이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이름도 있는 모임이다. I성향의 나는 딸의 친구 엄마들을 깊이 있게 사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지만 인생은 때론 신기하게 풀리는 법이라 이제는 거의 가족 같다.
그동안 네 가족 중 두 가족은 살던 동네를 벗어나 이사도 갔지만 여전히 생일을 챙기며 자주 보는 편이다. 아이들과 엄마만 모이기도 하고, 아이와 아빠만 모일 때도 있고, 완전체로도 모인다. 아이돌만 유닛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모임 속 유닛 활동을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완전체 모임이다. 게다가 큰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 운동회를 하기로 한 것이다. 친정집 앞마당에 제법 넓은 잔디밭이 있는데 작년에 모였을 때 우연히 피구와 발야구를 했고 아이들은 물론 어른까지 놀이에 흠뻑 빠졌다. 그 이후로 제대로 운동회를 해보자고 별러온 터였다.
두 달 전부터 날짜를 정하고, 디데이 날에 제발 비만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이 7명, 어른 8명이 참가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운동회였다. 사회와 진행을 맡은 아빠는 운동회의 기분을 업시켜줄 진행표까지 만들어 카톡으로 뿌렸다.
"우리 노는 거에 너무 진심이다. 이런 것까지 만들 일이야?"
"너무 웃기다."
"운동회 준비도 하고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은데, 감사하다고 꼭 전해줘."
운동회 당일, 조끼까지 입고 팀이 나눠지자 전의가 불타오른다. 손을 포개어 파이팅을 외친다. 생소한 요즘 게임에 머리도 굴려가며 안 쓰던 몸을 움직여본다. 1차 경기 협동공 튀기기는 서로 짠 것도 아닌데 아슬아슬하게 1점 차이로 레드팀이 승리했다.
'아! 이 드라마틱한 점수 보소!'
2차 여왕벌 피구에서는 아빠들이 공을 피하고 잡느라 날아다닌다. 허리 디스크가 있는 남편도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로 벌러덩 자빠지기까지 했지만 손에는 공이 들려있다. 멋짐 폭발이다. 같은 편의 환호를 받으며 비장하게 일어나서 공격을 개시한다. 상대편도 만만치 않다. 여왕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수비지역으로 가서 '피구왕 통키'를 보며 갈고닦은 패스 실력을 뽐낸다. 이번에는 5판까지 가는 접전 끝에 블루팀의 승리다. 두 게임만에 급하게 체력 고갈이 된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펄펄 날아다닌다. 괜찮다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시원한 물을 억지로 먹이고 2인 3각 게임을 시작한다. 어제 늦게 잔 것 같은데 아침부터 일어나서 2인3각 연습을 하더니 아이들은 둘이 아닌 한 몸처럼 보인다. 우리 부부도 에이스 아이들과 경기를 치러야 하는 탓에 그들을 이겨보겠다고 때아닌 어깨동무까지 한다. 맨날 서로 놀려 먹기 바쁜데 스킨십이라니, 그렇게 이기고 싶었냐며 다른 부부의 놀림을 받는다. 풍선 게임에서는 다른 편이 된 딸에게 엄청 쫓기다 풍선을 밟혔다. 엄마를 이기고자 친구들과 합세해서 달려든 딸의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이긴 자의 행복한 미소가 경기가 끝나도 생생하다. 아마 우리 모두가 어린이가 되어, 부모와 자녀라는 계급장을 떼고 온전히 즐긴 하루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들을 위해 만든 자리에 우리도 즐겁게 참여한다. 노는 것 좋아하지만 이벤트 회사에 가서 운동회 물품까지 빌려온 열정을 보자니 같은 부모로서 존경스럽다. 단지, 자녀가 즐거워할 것 같고, 원하는 일이기에 바쁜 일정 중에도 운동회와 가족 모임을 추진하는 우리 부모들 참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