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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ABC주스 레시피

by try everything

"자기야. ABC 주스 만들어 주면 안 돼? 진짜 맛있었는데."


얼마 전 위내시경을 하고 온 뒤로 몇 번이고 묻는다. 나는 대꾸도 안 한다. 못 들은 척 넘어가려는 나의 꼼수다. 의사 선생님이 아침을 꼭 먹으라 했다며 하다 하다 아침 타령을 한다. 우리는 이미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그것이 밥이 아닐 뿐, 시리얼, 삶은 달걀, 우유, 셰이크, 커피, 빵 등으로 요기를 한다. 점심시간 전까지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고 계속 서있다 보니 나 또한 아침을 건너뛰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못 버틴다.


ABC주스
1. 사과(Apple), 비트(Beet), 당근(Carrot)으로 만든 주스
2. 디톡스 효과가 있으며, 혈관 건강에 좋음.


몇 년 전, 지인이 콜레스테롤과 고지혈증으로 고민하던 차에 효과를 봤다며 추천하기에 먹기 시작했다. 한 1년은 꾸준히 매일 갈아 마셨다. 음식에 있어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아직도 생오이, 생토마토도 못 먹기에 건강 음료도 잘 마시지 않는다. 건강에 좋은 음료는 맛이 없다. 이런 내게도 ABC 주스는 의외로 맛이 있었다. 어릴 적 유일하게 좋아했던 사과(그러나 사과주스는 안 먹었다), 시력에 좋다며 엄마가 갈아준 당근, 그리고 안 먹던 비트의 조합인데 딸기주스처럼 느껴질 정도로 맛있다. 이러했으니 건강음료 거부자인 내가 매일 마셨겠지.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건강에 부쩍 관심도 생긴 터라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덕에 남편은 덕을 봤다. 매일 신선한 주스를 아침마다 마셨으니 말이다. 그 여정은 쉽지 않았다.


1. 사과, 비트, 당근을 적당량 구입한다.
(냉장고 자리를 너무 차지한다거나, 상할 정도로 쟁여 놓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그나마 보관기간이 긴 편이라 다행이다.)

2. 세척을 하고 필러로 껍질을 벗겨 작게 자른다.
(사과는 세척을 잘하면 껍질 째 갈아도 되지만 음료를 마실 때 꺼끌한 것이 느껴져서 껍질도 깎았다.)

3. 사과, 당근, 비트는 1:1:0.3 정도의 비율로 물과 함께 믹서기에 간다.


글로는 3개로 정리되지만 1,2번만 해도 손이 많이 간다. 한 달을 그렇게 사과 껍질과 사투하던 나는 잔머리를 썼다. 사과를 원물 100% 주스로 대체했다. 당근, 비트만 손질하고 사과는 주스로 대체했더니 한결 편했다. 맛도 훌륭했다. 여기에 만족할 내가 아니다. 이번엔 사과당근 주스를 샀다. 비트만 손질하면 되는 혁신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남편한테 제동이 걸렸으니,


"왜 오늘은 주스가 맑아? 건더기가 맛있는데."


그렇다. 3가지 재료 중 2가지가 액체로 대체되니 그동안 포만감을 주던 느낌이 사라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실패로 인정하고 다시 사과만 주스로 쓰기로 했다. 누군가는 ABC 분말을 물에 타서 마시기도 한다는데 이렇게 고생할 일인가 싶지만 이미 입맛이 2번째 레시피에 길들여져서 나부터 싫다고 거부를 하니 어쩔 수 없다. 건더기가 많아 좋다는 남편과 매일 사서 마시기에는 부담되는 가격, 나의 입맛 이렇게 3 콤보 덕에 1년을 매일 갈아 마셨었다. 그러다 이만큼 했으면 됐다는 내면의 합리화로 소리소문 없이 ABC주스는 막을 내렸다. 아쉬워하던 남편도 직접 만들긴 싫었는지 더 이상 해달라 칭얼대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최근 남편의 끈질긴 ABC주스 타령에 이번 주에 끄집어냈다. 주스를 만들어주겠다 말겠다도 없이 쿠팡에 예전 기억대로 주문하여 새벽배송을 시켰다. 아침 일찍 주방에서 비트를 손질하는 나를 보며 궁금해하는 남편에게 큰 선물을 하사한다.


"오늘 ABC주스 만들어줄게."

"진짜?"


세상 행복한 표정이다. 이번에는 이 결심이 예전처럼 오래갈 것 같지는 않지만 40대에 접어든 기념으로 건강한 번 챙겨봐야겠다.




간편한 ABC주스 만들기
사과 주스에 당근, 비트를 적당량 넣어 믹서기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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