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도 제주도를 간다. 새로운 곳도 좋아하지만 때론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도 좋다. 3년째 표선으로 여름휴가를 간다. 가기만 하면 집도 있고, 차도 있다. 완전 땡큐다.
15:10
경기도 북부에 살 때는 김포공항이나 인천 공항을 가기에 좋은 환경이었는데 경기도 남부로 오니 김포공항 가기가 제주도 가는 것보다 오래 걸린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공항버스 배차 간격도 워낙 넓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를 가지고 청주공항으로 갔었는데 올해는 집 앞에 다시 생긴 공항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을 가기로 했다. 3시 30분 출발이니 집에서 3시 10분에는 나가보기로 한다. 캐리어가 있으니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이며, 빠듯한 것보다는 여유 있게 도착하는 편이 낫다.
15:30
뙤약볕 아래 버스 차고지에서 바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에어컨이 제일 강하게 틀어졌는데도 버스 실내 온도가 41.5도다. 한동안 그렇게 40도에 머물던 온도가 점점 익숙한 온도로 내려간다. 김포공항까지 2시간 10분이 걸린다고 쓰여있으니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와 이어폰 하나씩 나눠 끼고 최신가요에 몸을 맡기고 출발이다. 1시간 30분쯤 지났을까, 햇빛이 뜨거워 꽁꽁 감춰놨던 창문을 열어보니 익숙한 곳이 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강이 보인다. 버스 전용 차로도 아닌 양 옆에 승용차들과 함께 도로의 한 중간이다.
'윽, 뭐야 아직 한강이면 언제 도착한다는 거야?'
급하게 티맵을 켜본다. 1시간 이상이 걸린다. 예전에는 얼마 남았는지 기사님께 여쭤보곤 했다면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보급 이후 스스로 남은 시간을 체크할 수 있어 좋다. 내 앞사람도 시간이 걱정됐는지 티맵을 켜서 확인했다.
'1시간 까지는 괜찮은데 더 막히면 큰일 나는데, 비행기 못 타는 거 아냐?'
결국 2시간 30분이 걸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와, 공항이다. 이제 진짜 여행 시작하는 것 같다."
18:00
"탑승권과 신분증 준비 부탁드립니다."
탑승 수속을 하는 줄 앞에서 항공사 직원이 먼저 1차 체크를 한다. 모바일 탑승권과 신분증을 제출하니 등본이나 아이 신분증을 묻는다.
"아.... 아이 것도 필요한가요? 잠시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등본이 필요했던가,라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까맣게 잊고 그냥 왔다.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지 신분증도 없이 오다니. 옆에서 걱정스레 바라보는 딸에게 괜찮을 거라 말하고 공항에 있는 무인 발급기에 얼른 가야 하나 생각하다 정부 24 핸드폰 앱에서 급하게 등본을 발급받아 본다. 줄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발급을 받고 한숨 돌리니 우리 순서다.
"신분증 여기요. 수하물 가족 합산 되죠?"
18:10
"네. 30Kg까지 가능하세요."
"45Kg 아닌가요?"
"위탁 수하물 2개만 신청하셨어요."
"아...."
또 확인을 안 했다. 남편이 항공권을 구입하던 2개월 전, 작년처럼 기내 수하물만 가져갈까 하던 물음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번에는 위탁 수하물 2개는 신청하자 했던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수하물로 붙이고 가볍게 다니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2개만 붙이고 1개는 기내로 들고 가기로 했다. 추가 요금 없이 해결이 되니 다행이지만 찰나의 순간 신분증과 수하물까지 난관에 부딪히니 기가 빨린 느낌이다.
"그래도 자기 덕분에 신분증이랑 수하물까지 잘 해결했다."
남편도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 민망하고 미안했는지 칭찬으로 무마하는 느낌이다.
18:30
지난번 공항에서 미리 등록해 둔 손바닥 등록 덕분에 가벼이 셀프 등록대를 거쳐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출국장에 들어가면 보일 거라 생각했던 면세점이 안 보인다. 얼핏 면세점이 없다는 표지판을 봤는데 진짜다.
"자기야, 원래 김포공항에도 면세점 없었나?"
"몰라. 그랬나 봐. 청주공항에만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면세점에 큰 욕심이 없어서인지 신경도 안 썼는데 막상 없으니 뭔가 아쉽다. 작년에는 청주공항이 작아서 면세점이 없는 줄 알았는데 김포에도 없었다. 안 사더라도 둘러보는 맛이 있는데 아쉽지만, 쇼핑을 좋아하는 남편이 있는 내게는 면세점이 없는 것도 좋다. 안 그랬으면
"자기야, 나 이거 하나 사면 안 돼?"
라고 했을 터이니. 그런데 나도 이번엔 백팩 하나 사야지 하고 마음속에 고이 넣어둔 물건이 있었는데 여러모로 아쉽긴 하다.
19:10
면세점 쇼핑도 안 했는데 떡볶이, 우동 세트로 저녁을 간단히 때우니 비행기 탈 시간이 됐다. 드디어 출발이다.
20:20
제주에 도착이다. 이젠 짐을 찾고 작년처럼 표선 콜택시에 전화해서 숙소에 가면 된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남편이 콜택시에 전화를 하더니 한참을 붙잡고만 있다가 말한다.
"자기야, 지금 시간에는 콜을 안 받는대. 어떡해?"
"엥? 진짜? 일단 알았어. 검색 좀 해볼게."
오늘 하루 진짜 쉽지 않다. 작년에는 그렇게 갔었는데. 작년에는 일찍 도착했나,라는 생각을 하며 급하게 검색한다.
[제주공항에서 표선 가기]
1. 표선 콜택시 -> 시간이 늦어서 안됨.
2. 버스 -> 방금 1대가 갔고, 1시간 30분 후에 막차가 있음. 너무 오래 기다리는데? 도착해서도 연결 버스가 없어서 20분 정도 걸어야 함.
3. 애월 콜택시에 전화해서 표선으로 가달라고 한다 ->이게 좋겠다!
3번을 알아내고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했더니 안 간단다. 분명 어떤 이는 그렇게 갔다고 했는데 좌절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버스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아직 안 찾은 짐도 기다리면 1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아이에게는 애써 침착하게 말하지만 한 손으로는 근처 저렴한 숙소나 렌터카도 같이 검색한다. 힐끗 본 아이가
"엄마, 제발 호텔 가면 안 돼요?"
여기까지 와서 잠만 자고 가기에는 아쉽다. 아침에 또다시 캐리어 끌고 나와서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느니 고생이 되더라도 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아이를 달래 본다.
"근데 또 가서 많이 걸어야 하잖아. 밤에 걷기 싫은데."
"엄마 아빠가 안 무섭게 지켜줄게, 오늘은 바람도 많이 불어서 시원한 편이야."
"엄마, 우리 노숙자 같아."
"아니야, 우린 그냥 버스 기다리는 사람이야."
아이는 뭔가 우리 처지가 불쌍했는지 노숙자 같은가 보다. 딸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일부로 남을 것이기에 괜찮다.
21:50
버스에 탔다. 이제 55분 후에 도착이다. 10시 45분. 거의 11시에 깜깜한 밤거리를 캐리어를 끌고 다닐 생각 하니 지친다. 그래도 막차라도 있으니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는다. 같은 곳으로 몇 번째 오다 보니 긴급상황에서도 대처가 된다. 도착해서 집에 가는 길은 고생스럽긴 해도 길이 눈에 선하다. 물론 계획을 잘 세워서 이런 일을 안 만드는 것이 제일 좋기만 하지만.
22:45
도착이다. 익숙한 정류장이다. 진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워낙 고요한 밤이니 캐리어 바퀴 소리가 동네를 울리는 느낌이다.
"여기 우리가 아이스크림 사 먹었던 편의점이다. 조금만 더 가면 00 식당이 나올 거야. 하나로 마트가 사라졌네. 내일 우리 여기 돈가스 집에서 밥 먹자. 조금만 가면 이제 집이 나올 거야."
택시를 타고 시원하고 편하게 집에 도착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밤중에 기억을 회상하며 골목길을 훑어보는 맛도 있다. 3번째 왔다고 추억거리가 듬뿍 쌓여있다.
23:00
최최최최종 도착이다. 계획서의 완결판처럼 제주도 도착의 최종 완결판이다. 장장 8시간에 걸친 제주도 여정이다. 이 시간이면 발리도 갔겠다 싶다. 이렇게 우리의 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다음에는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뽀송한 이불에 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