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와 청소병이 도진 요즘, 샤워를 하다가 물때가 낀 샤워부스가 보였다. 며칠 째 청소 해야지, 만 되뇌다가 하필 지금 결단이 내려졌다. 아무 계획도 없는 주말, 화장실에 이미 들어와 있는 지금이 바로 청소할 때인 것이다. 문득 화장실 청소를 하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청소하고 물기까지 닦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 편이 더 나아 보였다.
얼룩덜룩한 샤워 부스의 양면에 뜨거운 물을 사정없이 뿌렸다. 세면대를 닦는 작은 수세미에 바디워시를 뿌려 비누칠을 해주었다. 청소용 세제가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청소에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 청소를 하게 되어 피부를 위해 바디워시를 희생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비누칠을 했다. 서걱 거리는 느낌이 드는 부분은 두 손을 포개어 박박 문질렀다. 그러면 매끈한 느낌이 나는 순간이 생기는데 묵은 때가 잘 벗겨졌을 거란 생각이 들어 손이 경쾌해진다. 모든 면을 다 닦고 다시 한번 뜨거운 물을 쏘아대면 아까와는 다른 투명한 창이 보인다. 안 만져봐도 뽀득뽀득할 것이다.
처음에는 샤워부스만 청소할 생각이었는데 요란하게 물을 뿌려댄 탓에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바닥까지 구석구석 닦다 보니 이제는 변기가 보인다.
'안 되겠다. 여기까지 청소해야지.'
일단 세제를 충분히 뿌려놓고, 막대솔로 문질러 본다. 성에 안 찬다. 고무장갑 생각이 간절해진다. 변기일지라도 고무장갑을 끼면 손대고 싶지 않던 곳까지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생긴다. 아이언맨에게 슈트가 있고, 스파이더맨에게 쫄쫄이가 있는 것처럼 내게 고무장갑이 있다면 천하무적이 되어 지저분한 것도 아무 상관없는 듯 척척 만질 수 있을 텐데.. 청소 앞에서 고무장갑 만능론이 부활한다.
이쯤 해서 고무장갑을 낀 나의 무용담을 늘어놓자면, 교실에서 학생이 토를 해도 분홍색 대(大) 자 두꺼운 태화 고무장갑을 끼면 5분 안에 정리할 수 있다. 고무장갑을 끼고 두꺼운 키친타월 몇 겹을 뽑아 쓱쓱 닦아 비닐봉지에 넣고, 소독스프레이까지 뿌리면 끝! 비위가 약한 나의 위장이 눈치 없이 헛구역질을 하지만 이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 스파이더맨도 바닥에 떨어질 때가 있으니 천하무적 고무장갑맨도 헛구역질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맨 손의 나였다면 그런 용기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고무장갑을 끼면 생선과 생닭도 손질할 수 있게 된다. 역시 고무장갑의 힘은 위대하다.
이번에는 내 남편의 이야기다. 시골에서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지네와 같은 벌레를 잡을 때 남편도 고무장갑의 힘을 빌린다. 고무장갑을 양손에 장착하고 성큼성큼 다가가 휴지를 두껍게 말아 벌레를 처단한다. 그 역시 고무장갑의 힘을 빌렸다.
이 힘의 끝이 어디일까 궁금하게 하는 고무장갑이 없으니 변기 닦기는 마음에 썩 들지 않고 시늉만 내고 끝이 났다. 그래도 한번 손길이 닿으니 반짝반짝 해졌다. 가볍게 세면대까지 닦고 바닥까지 청소하고 스퀴지로 물기까지 제거하여 화장실 청소를 마쳤다.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당분간은 화장실을 쓰지 않고 싶을 정도다. 정리 단톡방에 인증샷을 찍어 오늘의 청소를 마친다.
1mm도 안 될 것 같은 두께의 얇은 고무장갑이 주는 힘과 용기 덕분에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고, 선생님 노릇도 하고 산다. 집과 교실에 고무장갑을 두고 때때로 용감무쌍한 나로 변신한다. 떨어지지 않게 쟁여두어야겠다. 힘이 사라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