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난 여행.

다음 시간 여행지는 어디?

by try everything

"엄마, 미션하고 올게."

"미션이 뭔데?"

"혼자 여행하기!"

"진짜 혼자 갈 거야?"

"왜? 같이 가고 싶어?"

"외롭지 않겠어? 어디 갈 건데?"




이옥선 작가의 '즐거운 어른'을 책 모임에서 한 달 동안 읽고 있는데 매주 미션이 주어진다. 이번 주 미션은 3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나에게 꽃다발 선물이었는데 일주일 전에 결혼식에 갔다 오며 꽃을 한 아름 들고 온지라 패스. 두 번째는 유언장 쓰기였는데 쓰면 쓸수록 어려워져서 반쯤 쓰다 포기. 마지막 세 번째가 혼자여행이었다. 혼자 여행은 딸린 처자식, 아니 딸린 남편과 자녀가 있어서 생각지도 않다가 여행이 아니라 나들이 정도로 변경하니 마음이 가뿐해져서 차로 40분 거리의 그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은 간단하게 때우고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사골국 대신 카레를 냄비 가득히 해놓고, 혹시나 귀가가 늦어져도 간단히 저녁을 해결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한다. 왕복 3-4시간이면 될듯한 여정에서도 엄마라는 이유로 가족 끼니 걱정이라니. 청승맞은 느낌이라 다음에는 가족 걱정 없이 며칠 동안 진짜 '혼자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나를 위한 준비는 선캡과 물, 차키 이거면 됐다. 은근히 설렌 엄마의 뒤로 외롭지 않겠냐며 딸이 다시 한번 걱정을 담아 배웅을 한다. 차에 앉아 목적지를 설정했다. 심장이 자주 요동치는 편이라 그런지 이번에도 가벼운 두근거림이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좋아하는 라디오를 켜고, 차 문을 살짝 여니 틈새로 바람이 상쾌하게 들어온다. 바람뿐만 아니라 따가운 햇빛도 들어와서 다시 창문을 올렸지만 여행의 설렘은 멈추지 않는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여기가 맞나?'와 '와! 맞네', 를 번갈아 하며 운전대 앞으로 고개를 쑥 빼고 두리번 거린다. 차를 주차하고는 낯선 듯 익숙한 거리를 걸어본다. 지나가다 들른 게 아니라 이곳을 콕 집어 달려왔다. 그녀를 만나기 전 100m 전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도착하기 100m 전이다. 100, 90.... 3,2,1m.


도착.


바로 나의 첫 발령지.
초등학교 선생님이란 여정의 시작점이 된 oo초등학교.

학급 증설로 자리가 난 1학년 8반이 나의 첫 교실이다.



사람이 드나들어도 될 만큼 교문이 열려있었지만 남의 학교에 불쑥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교문사이로 나의 첫 교실도 볼 수 있었다.



토요일도 등교했던 옛날 옛적, 교문에서도 가깝고 1층에 위치한 1학년 교실은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로 토요일마다 창문을 통해 공개수업이 펼쳐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나면 새내기 교사는 적어도 30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의자에 기절하듯이 구겨져있었다는 것도, 아이들을 주려고 산 마이쮸를 한 개씩 까먹으며 원기를 충전하다 금세 책상 위에 마이쮸 껍질이 수북이 쌓였다는 것도(나의 첫 닉네임 마이쮸는 여기서 탄생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화장실을 갔다가 아이들이 내가 있던 칸의 문을 두드리며 "얘들아, 여기 선생님이 있어."라고 소리를 치고 문에 귀를 기울이는 통에 기겁을 했던 일도(이 일 이후로 화장실은 쉬는 시간에 가지 않는 편이다), 요령이 없어 목이 쉬어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목이 아프다 했더니 그게 뭐 어째서요,라고 철없이 대꾸한 1학년 아이의 말에 눈물이 차올랐던 일 등이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단지, 멀리서 그 교실을 본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렇게 천천히 학교를 둘러보며(여전히 밖이지만) 첫 학교의 4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휘몰아쳤던 기억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내가 살던 곳으로 향했다. 5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뛰어가던 내가 생각났다. 집에 온수 매트를 끄고 출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아침 내내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2교시 즈음 외출을 달고 집까지 달려갔던 나, 결과는 기억나지 않지만 화재가 날까 봐 부리나케 뛰던 내가 떠올랐다. 길을 직접 걷지 않았다면 계속 묻혀 있었을 기억 덕에 웃음이 났다.


지금은 2층짜리 다이소가 들어선 곳이 예전엔 뭐였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 생경한 곳이면서도 때론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풍경이 어제 본 것처럼 그대로인 곳도 있다. 들어갈 때는 낯설고 돌아 나올 때는 익숙한 지점들도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 두리번거리며 조각난 기억을 하나씩 주워나갔다. 결국에는 짜 맞추지 못한 파편도 있었지만 이만하면 됐다.


조각난 기억 속 젊은이는 유럽여행을 가려면 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집 앞 헬스장을 다녔고 운동이 끝나면 1층 마트에서 떡볶이랑 맥주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으며, 퇴근 후에는 수원역으로 영어 학원도 다녔다. 학교에서 막내라는 이름으로 120시간 집합연수에 꽂혀서 방학을 깡그리 반납하기도 했지만 어느 해에는 유럽과 호주를 누비고 다녔던 청춘의 나도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누군가와의 이별도, 설렘도 만남도 있었던 20대의 청춘, 사회 초년생, 신규 교사, 직장인이었던 수많은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넷플릭스-태어난김에 세계 일주 중 한장면


요즘에 즐겨보는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서 군인이었던 덱스가 용병학교에 와본 것으로 잊고 있던 과거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오늘의 나도 선생님이란 꿈을 이룬 기특하고 대견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가끔은 버겁게 느껴지는 교사 생활이 오늘의 경험을 통해 웃음지으며 다시 한번 전진할 힘을 얻었기를 바라본다.




20년 동안 선생님으로 살아왔고, 또 이만큼을 선생님으로 살아갈 나에게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라고 응원도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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