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안개꽃, 국화꽃, 그리고 이름 모를 노랗고 분홍색꽃 사이에서 그가 소리 없이 환하게 웃고 있다. 꽃 속에 파묻힌 아버님 아래로 향 연기가 피어오른다.
주방에서는 50인분 밥과 몇 kg짜리 반찬이 적힌 메뉴판을 보며 사골우거지국이 나은지 육개장이 나은지 고민이 한창이다. 상차림은 어떤 반찬으로 구성하는지도 결정해야 한다,떡은 절편,송편,바람떡,꿀떡,모듬떡이 있단다. 결정장애를 가진 나로서는 매 순간이 고비다. 고민 끝에 꿀떡과 절편을 고른 내 뒤로 주방 여사님이 꿀떡은 하루 지나면 딱딱해져요,라며 좀 비싸더라도 모듬떡이 나을 거라며 귀띔해 주신다.
식장 구석 테이블에서는 충전기에 꽂힌 핸드폰을 붙잡고 부고 문자를 보낸다. 아들들은 장례지도사가 보여주는 화면 속 추천 납골당을 순서대로 눌러본다.
업무를 처리 중인지, 상중인지 모를 모습으로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입, 짙은 쌍꺼풀의 눈, 단단해 보이는 몸. 그리고 흰색 바지에 컬러풀한 상의.
시아버지의 ootd다.
옷을 좋아하시는 아버님 옷장은 알록달록한 옷으로 넘쳐난다. 뭔 옷을 또 샀냐며 불만이신 시어머니를 지나치며 상표를 떼고 옷을 입어보신다.
옷을 좋아하는 아버님은 흰색 신발도 많다. 하얗기만 한 구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테일이 다르다. 운동화도 검정보다는 반짝이는 흰색이다. 내게는 흰색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나 멋 좀 부립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느낌인지라 약간은 남사스러운데 아버님은 백바지에 백구두로 스타일을 완성한다.
어느 여름에는
"여름옷 있나?옷 사게 나가자."
하시며 며느리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하늘색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사주셨다. 그 옷은 지금도 무채색 옷들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통 활쏘기인 '국궁' 심판 자격증이 있으신 터라 도민체전, 지역 궁도대회 시즌이 되면 전국각지를 활보하신다. 심판 목걸이를 걸고 대회 티셔츠 유니폼에 백바지로 완성한 위풍당당한 모습은 카톡 프로필이 되어 친구들에게 전해진다.
슬퍼할 시간보다는 결정해야 할 시간이 많은 장례식의 상주. 손님을 위한 좋은 장소와 맛있는 음식은 정했다. 이번엔 아버님만을 위한 결정이다.
아버님의 유골함을 골라본다.
기본이라는 단정한 흰색 유골함은 내 스타일이지만 이번에는 아버님이 되어 골라본다. 너무 튀고 휘황찬란하여 은근히 촌스러운 것은 제외하고, 금색 띠와 문양이 조화로운 것으로 골라본다.
아버님도 거울에 비춰보지도 않고 과감히 택을 떼실 것 같다. 남겨진 사람들이 아버님께 해드릴 수 있는 취향 존중이다. 멋쟁이 아버님에 어울리는 멋진 것으로 마지막 가시는 길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