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다니던 1990년대, 동네 곳곳에 책 대여점이 있었다. 300원~500원 정도에 만화와 책을 빌려주던 곳인데 기억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대여점으로 충족이 안될 때는 신월동에서 버스를 타고 영등포를 갔다.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와 경방필 백화점인지 아니면 다른 건물이었는지 또다시 기억이 흐릿하지만 근처 어딘가의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비닐 포장이 없는 하이틴 소설책을 골라 벽기둥이나 책장 사이에 쭈그려 앉아 책을 읽는다. 사지 못할 책이니 책을 활짝 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왼쪽, 오른쪽 돌려가며 읽는다. 다리가 아플 쯤이면 제자리에 서서 책에 눈은 고정한 채 발을 번갈아가며 뻗어본다.
어쩔 때는 보고 싶은 책을 사달라 조르면 책은 빌려보는 거라던 엄마에게 '난 나중에 엄마가 되면 내 자식은 사달라는 책 다 사줄 거야'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내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갈 때쯤, 남들은 영사님을 통해 몇 박스씩 책을 구매할 때 나는 '영사'가 뭐냐고 질문하는 엄마가 됐다. 내 자식은 원하는 책 다 사주겠다고 큰 소리 뻥뻥 쳤던 나인데. 알록달록 구성이 좋았던 전집과 어디 상을 받았다던 책은 왜 그리 비싼지. 조리원 동기 집 전면 책장에 꽂힌 명작동화책을 몰래 검색하니 30만 원이 넘었다. 그 옆에 한 칸밖에 차지하지 않는 영어책은 더 비쌌다.
'몇 권 안 되는데 무슨 애들 책이 50만 원이 넘냐.'
말은 이래도 내 아이를 위해 전집 하나는 사주고 싶었던 나는 몇 날 며칠의 검색 끝에 몇십 권에 4-5만 원 하는 명작동화책을 주문했다. '0'이 하나 덜 붙은 그 책을 받아보니 새 책이었지만 고전적인 글씨체에 그림체도 나의 어릴 적과 다르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책정리 하는 지인들을 통해 책을 얻곤 했다. 책을 물려받던 우리도 어느새 책장이 꽉 차버렸다. 책 욕심이 있어 아이의 연령과 상관없이 물려받은 책들이 책장을 차지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에 있는 책은 어느새 골칫덩어리가 되었고, 읽지도 못했던 물려받은 몇 가지 책들은 이사하며 결국 버려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주위에 도서관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은. 알 수는 없지만 국가 정책이었다면 100번이라도 칭찬하고 싶다. 여자들의 사회 진출에 공헌을 했다는 세탁기 발명급이다. 도서관은 신세계다.
책이 많고 공짜다. 게다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유효한 책이 집에 별로 없는 관계로 특별한 일 없으면 아이와 도서관에 갔다. 신도시답게 도서관이 많아서 골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영어책 특화 도서관, 주차장이 널널한 도서관, 아동과 성인 열람실이 연결된 도서관, 책 읽는 공간이 다채로운 도서관, 체험공간이 함께 있는 도서관, 학습 만화도 대여해 주는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새로운 도서관이 개관했다고 하면 무조건 갔다. 그만큼 나에게 도서관은 신상 핫플 카페였다. 새로 생기면 가보고 싶고, 심심한데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가고 싶은 곳. 아이가 점점 내 품을 벗어나 혼자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더 여유롭게 도서관을 즐길 수 있었다.
도서관 사랑은 여행 가서도 그치지 않는다.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책이음 카드를 만들면 천하무적이다. 국내 어느 도서관을 가도 책을 빌릴 수 있다. 자주 가는 태안과 제주도는 물론 짧은 여행을 가서도 유용하다.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도 비 예보가 있으면 관광 대신 도서관으로 출동했다.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다 보면 새로운 공간이 주는 멋이 더해져 책 읽는 맛이 났다. 펜션 체크인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대부도에서도 카페 대신 도서관을 찾았다. 작고 오래되었지만 따뜻한 느낌이 풍긴다. 인스타그램에 나오지 않는, 현지인들만 가는 찐맛집을 찾은 기분이다.
결핍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족함'이 아이를 성장시킨다 믿는 엄마다.
어린 시절 책이 부족했기에 책을 갖고 싶었고, 더 많이 읽고 싶었다. 그 덕일까 지금도 책이 좋다.
알아서 책장에 책을 넣어주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는 도서관을 좋아하고, 정말 좋아하는 책은 직접 살 수 있는 기쁨과 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내 아이는 부족했던 경험보다는 도서관에서 즐거웠던 경험을 기반으로 책을 좋아하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
누군가의 집 책장에 꽂힌 책들은 그 사람만의 것이지만, 도서관에 있는 책들에게는 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