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꾼 이중섭

이건희 회장님 덕분이에요.

by try everything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은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의 유족에게 2021년 4월 기증받은 1,488점 중 이중섭의 작품 90여 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이중섭 기소장품 10점을 모아 100여 점으로 구성한 전시다.


서울에 나온 김에 평소에 못해본 것을 하고 싶어 미술관이나 박물관 사이트를 기웃거린다. 이건희 컬렉션이 진행 중이라는 국립현대미술관 예약창을 어제부터 열심히 두리번거려보지만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열심히 영위 중인지 이미 매진이다. 작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할 때도 못 갔는데 이번에도 못 가겠다. 역시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 아쉬운 마음에 커피를 마시며 다시 한번 예약창을 확인해 보니 2시간 후에 관람 가능한 표가 보인다.


"오예!"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딸은 거기에 꼭 가야 하냐며 입이 삐죽 나온다. 핸드폰에서 본 전시 설명을 빠르게 읊어대며 다시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 설득한다.


"우리 쓰는 핸드폰 회사가 삼성인 거 알지? 삼성이란 회사의 회장님이 돌아가시면서 미술 작품을 기증했는데 그걸 우리가 보는 거야. 이거 끝나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라. 소 그림도 알지? 그걸 그린 이중섭 화가의 작품만 전시한 건데, 회장님 90점, (뭐라고? 기증한 작품이 10점이 아니고 90점이라고? 미술관보다 많이 가지고 있던 거야?) 미술관 10점 합쳐서 100점 전시한대. 그리고 더 보고 싶어도 딱 1시간 밖에 못 봐."


장황한 설명보다는 어차피 딱 1시간밖에 못 본다는 사실에 그럼 얼른 보고 집에 가자며 그제야 따라나선다.


미술을 감상하는 법은 잘 모르지만 미술관에서 작품을 볼 때의 그 느낌이 좋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고 뭔가 들여다보는 느낌. 때론 나도 이 정도는 그리겠다는 망언을 해대는 그 시간이 좋다.




오랜만의 미술관이다. 오늘 입고 온 까만 롱패딩보다는 카멜색 코트가 어울렸을 텐데 제법 아쉽다. 시간별로 인원을 제한해서 전시장이 많이 붐비지는 않지만 왠지 사람들에게 밝은 에너지가 느껴져 공간이 붕 떠있는 느낌이다. 아내를 향한 이중섭의 편지가 전시된 입구를 지나니 드디어 진짜 작품이 보인다. 이 방 끄트머리에서는 도슨트의 설명이 들린다. 설명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딸의 손을 잡아끌어 그 무리로 돌진한다. 사람들 뒤에서 틈새를 찾아 머리를 기웃거린다. 그러다 갑자기 도슨트가 휙 돌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내 쪽에 있는 그림을 설명한다.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내 자리가 곧 명당이 된다. 그때부터 맨 앞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설명을 들으니 계속 눈 맞춤을 하며 인자한 미소로 설명을 해주신다.


강렬한 소 그림을 예상한 나는 손바닥만 한 엽서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긴 편지에 눈길이 간다.


지금 내가 사는 주변의 풍경과 호박, 호박꽃, 꽃봉오리, 커다란 이파리를 그리는데....

자기 전에는 반드시 그대들을 떠올리고.....

태현 남덕 태성 대향 네 가족의 생활.....

행복하게 하나로 녹아든 모습을 그린다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중


완전 사랑꾼이다.


이건희 회장님 덕분에 사랑꾼 이중섭을 재발견한다. 물론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건희 컬렉션에 와서 알게 된 난 이렇게 생각하련다. 미술작품 말고도 문화유산 2만 1,69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고, 거기에는 국사 교과서에서나 들어본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그 가치가 엄청나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기쁜 나처럼 딸은 집에서 엄마랑 미술활동 해 볼 생각으로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담배갑 속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라는 은지화에 관심을 가지는 딸에게 미끼를 던졌기 때문이다.


"집에서 엄마랑 비슷한 거 만들어볼까?"

"우리 집에 담배 없잖아."

"비슷한 걸로 하면 되지. 쿠킹포일로 해보자. 엄마도 안 해봐서 안될지도 모르지만 해보자."

"좋아."


원래는 벽면 가득하게 채울 생각으로 연습처럼 그린 은지화라고 했다. 이중섭은 끝내 실행하지 못했지만 전시관에서는 그에게 헌정하듯 한쪽 벽면 가득 은지화로 채웠다.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그저 그림을 확대했구나, 로 알았을 텐데 기획자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진다. 한참 들여다보니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떠올랐다. 실제 그림으로 환생했다면 거대한 게르니카를 보고 내가 놀랐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더 볼 수도 있지만 딸과 약속한 1시간만 보고 미술관을 나온다. 마음에 무엇이 가장 크게 남았는지는 다르겠지만 일상과는 다른 1시간이 제법 의미가 있었다.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엄마는 돌아오자마자 쿠킹포일을 길게 잘라 엽서크기로 접고서는 아이에게 내민다. 아이는 주방으로 달려가 이쑤시개를 찾아내서는 뚝딱 그림을 그린다. 아크릴 물감으로 칠까지 해서 작품을 만들어본다. 은지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칠한 부분이 반대가 된, 해석이 거창한 작은 그림을 만들어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딸에게 엄마가 속삭인다.


"우리, 다음에 또 미술관 가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도 이건희 컬렉션이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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