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랭귀지 수업

언어의 장벽

by 우스갯소리

도착한 날은 짐을 풀고, 본격적인 교육 봉사는 이튿날부터 이루어졌다. 30여명의 팀원들이 의료, 미용, 요리, 시설 보수 등 각자의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다. 나는 한글을 가르쳐 달라는 현지의 요청에 따라, 4~6세까지의 유치원 아이들의 한글 교육을 맡았다. 본업이 교사이니 교육은 익숙한 일이지만,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에 수업을 앞두고 오금이 저려왔다.


필리핀은 따갈로그어와 영어를 사용하는데 내가 만난 현지 사람들 대부분은 따갈로그어를 썼다. 학교에 다니는 고학년 아이들부터 청년들까지는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으나 문제는 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연필 잡은 손가락의 뼈가 툭 튀어나올 만큼 학생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 공부에 영어도 응당 포함되어 있지만, 프리토킹 상황에 처하면 맥을 못 추는 것이다.


특히 간단한 의사소통을 벗어나 나의 생각을 전달할 때에는 영어 문장을 구성하여 말로 내뱉기까지 로딩 시간이 꽤나 걸렸다. 온 에너지를 영어 문장 구성에 쓰느라 표정이 굳어진 탓에 상대방은 내가 성이 났다고 오해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실제로도 나의 뇌가 성이 났는지 모르지만, 영어를 구사할 때 재차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게 입꼬리만은 올라가도록 수시로 체크해야 했다.


여하튼 나는 영어로 한글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영어로 말해도 4~6세의 아이들은 못 알아듣기 때문에 현지 선생님이 내 영어를 듣고 아이들에게 따갈로그어로 통역을 해줘야 했다. 아이들이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만국 공통어라는 바디랭귀지를 최대한 동원하여 '리핏애프터미(따라하세요)'를 연발하면서 수업을 이어갔다. 현지 아이들이 율동과 미술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듣고 바디랭귀지로도 전달이 충분한 수업을 준비해 간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매일의 수업은 다음과 같이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1. 노래 따라 부르며 율동하기

2. 노래에 나오는 한글 단어 익히기

3. 익힌 단어를 활용하여 미술 활동 하기


첫날 수업에서는 '한글 자음, 모음' 노래를 사용했다. 노래에 율동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몸으로 기역, 니은, 디귿...히읗을 어떻게 만들어볼까 궁리하고 따라해보면서 한글 자모음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작은 몸짓까지도 놓칠새라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따라하는 아이들 모습이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자음 모양에 따라 양 손을 활짝 벌려보기도 하고, 다리도 찢고, 한바탕 몸을 움직인 후에 한글 자모음 스티커를 모양에 알맞게 붙여볼 수 있도록 했다. 헷갈리는 방향까지 정확하게 구분해서 척척 해내는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손쓸 도리가 없어 스티커를 붙여보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하는 아이도 있었다.


"오케이, 이프 유 피니쉬드, 유 캔 고 홈.(끝났으면 집에 가도 좋아요.)"

이미 수업 마치는 시각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끝난 학생들을 순차적으로 집으로 보냈다. 스티커 붙이는 일까지 마무리한 아이들은 각자 완성한 것을 훈장처럼 집으로 들고 갔다. 한 명, 두 명... 인사하고 돌아가자 어느덪 교실에는 한 명의 아이가 남았다.


따갈로그어로 이야기해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아이와 함께 온 아이의 엄마가 이제 우리도 집에 가자고 했던 것 같다.

"우어어어아아아앙!!!!!!"

아이는 갑자기 바닥을 구르며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의 표정을 보고 현지 선생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영어로 통역하여 말하기를,

"여기에 남아서 공부를 더 하고 싶대요."

그렇게 교직 경력 10년, 필리핀에서 전에 없는 바디랭귀지 수업을 하고 난생 처음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오열하는 아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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