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초등 교실에서 가장 많이 쓰는 학용품 중 하나가 색연필이다. 학기초 필수 준비물에 늘 이름이 올라가 있는 학용품이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은 1년 내내 사물함에 색연필을 넣어두고 수시로 꺼내 쓴다. 선 긋기, 색칠놀이 등 저학년 교과에는 색연필을 활용하는 다양한 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색연필이 언제부터 이렇게 널리 쓰였는지 모르지만 초등학생 때 12색 지구 색연필을 사용해본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 익숙한 돌돌이 색연필을 필리핀 교육 봉사로 아이들 책상 위에 펼쳐놨을 때, 아이들은 다양한 색깔에 감탄하면서 얼른 써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리가 준비한 새 색연필은 모두 색연필심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쓰고는 싶은데 어찌 써야하는지 모르는 당황스러움이 아이들의 표정에 묻어났다.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색연필심을 밖으로 꺼낼 수 있는지 몰랐다. 다행히도 잠시 색연필을 들어 살펴보고 만져보더니 윗부분을 잡고 돌리면 색연필심이 길어지거나 짧아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필리핀 아이들의 함박 웃음을 기대하며 우리가 준비한 회심의 아이템들이 많이 있었지만, 색연필은 그냥 필요해서 준비한 것 중 하나에 불과했다.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이 1도 없는 학용품이어서, 현지 아이들에게 색연필 사용 방법을 알려줘야 하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뿐더러, 색연필을 그렇게까지 신기해하고 좋아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일상에서 우리가 자각없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현지인들과 소통하면 소통할수록 내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선명해졌다. 오전에 교육 봉사를 마치면 오후에는 마을의 가정을 두루 방문했는데, 대부분은 가족이 함께 살고 있지 못했다. 할머니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시거나, 엄마나 아빠 한 쪽이 어린 자녀를 키우고 있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돈벌이를 하러 오랜 시간 원래 거주하는 집을 떠나 있거나, 질병이 있는데 의료적 조치를 받지 못해 증상이 악화되었거나,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연로하여 홀로 남은 분들은 여생 내내 그들의 안전만을 걱정하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는 것, 주말에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가족이 안전한 것... 이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 소망해야 하는 이들을 직면하고서야 당연하게 누리며 불만을 품고 사는 내 모습이 또렷해져서 실로 흠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