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집, 느린 대화

할머니 댁을 다녀오며 마음에 남은 것들

by 따뜻한 법

목차

1. 누나라 부르기 싫었던 아이
2. 사라진 강아지, 남겨진 마당
3. 더 이상 차리지 않으시는 밥상
4. 부러질 듯한 손, 흐르는 말
5. 꽃을 꺾지 않았던 사람
6. 말은 품고, 사람은 보듬는다


1. 누나라 부르기 싫었던 아이

할머니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아직도 생생한 건, 그 날의 공기가 너무 또렷해서일까. 나는 방 한 구석에서 엉엉 울고 있었고, 어머니는 웃고 있었다. 사촌누나와 생일이 몇 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왜 내가 '누나'라고 불러야 하느냐며 울었던 장면이다. 그 옆에 할머니가 조용히 있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철없는 일이지만, 아이였던 나는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 집에는 얼마 뒤 강아지가 들어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귀가 쫑긋한 하얀 개였고, 자주 마당 한쪽에서 졸고 있었다. 그 강아지는 더 이상 없다. 한참 전 세상을 떠났고, 그 자리에 이제는 빈 바람만이 남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아지는 떠나고, 아이는 자라났다. 사촌누나는 취업했고, 나는 여전히 누나라는 단어에 어색함을 가진 채 어른이 되었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울기만 했고, 할머니는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말없이, 다만 나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그때도 노인이셨다. 내 인생 속의 할머니는 늘 주름이 깊었고, 허리가 살짝 굽어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 굽은 허리가 조금 더 가늘고, 조금 더 느리다.

2. 사라진 강아지, 남겨진 마당

다시 그 집에 갔을 때, 마당은 그대로였다. 이제는 강아지 대신 오골계가 울고, 오래된 대문은 여전히 덜컥거렸다. 다만 그 풍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만 빠져 있었다.

이따금 할머니 댁에 내려가는 건 아버지의 제안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일종의 다짐처럼 느껴진다.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너무 늦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그 방문은 언제나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무겁게 한다.

대문을 열면 가장 먼저 대문 옆을 살핀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강아지가 없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강아지는 떠났고, 할머니는 여전히 거기 계신다. 다만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지쳐 보이신다.

이제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신다. 예전보다 많이 느려지셨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우시다. 내려가면 고모가 모든 음식을 미리 준비해두신다. 이번에는 특히, 할머니가 고모를 여러 번 재촉하셨다고 한다. 손님 대접은 꼭 해야 한다며, 걷는 것도 버거우실텐데 마음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으셨다.

3. 더 이상 차리지 않으시는 밥상


그 점이 나에겐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죄송스러웠다. 할머니가 고모에게 한 마디라도 더 하셨다는 사실이, 나 때문이었다는 것이. 나는 그만큼 가치 있는 손님인가, 아니면 그냥 오래된 의무감의 대상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는 언제나 정성껏 밥상을 차려주셨다. 그 모습이 마음 깊이 고마웠다. 고모가 내어주신 음식들은 평소 먹던 것과는 다르다. 생고기, 삼계탕, 문어.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방식대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할머니의 마음과 함께 고모의 손길도 담겨 있다. 직접 손질하지 않으셨더라도, 그 모든 준비에 깃든 마음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음식을 먹으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은 항상 그런 방식으로, 조용히 다가온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간다.

4. 부러질 듯한 손, 흐르는 말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와 함께 고모댁을 나섰다. 거창한 외출은 아니었다. 차를 타고 다시 할머니 댁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동네 풍경들이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할머니와 길을 나서는건 오랜만이었다.

할머니의 손은 너무 가늘었다. 내가 손을 잡으면 부러질까 봐 조심스러웠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지만, 아마 예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바라보지 않았던 것일 뿐.

차에서 내려 집까지 걷는 짧은 길, 할머니는 혼자 걷기 위해 애쓰셨다. 나는 혹시라도 넘어지실까 봐 조심스레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가, 괜히 불편해하실까 봐 다시 머뭇거렸다. 괜히 안절부절하며 발걸음을 맞췄다.

집에 도착해 조용한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적막하고 약간 차가운 공기가 먼저 느껴졌다. 그제야 할머니가 조용히 입을 여셨다. 이야기는 중간중간 끊기며 이어졌고, 특별한 건 아니었다. 몸이 자주 아프다는 말, 여행 갔던 날이 좋았다는 말, 그리고 요즘은 조금 심심하다는 말들. 그 말들 사이로, 할머니의 외로움이 살며시 묻어 나왔다.

그 이야기들은 마치 깊은 산 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 같았다. 강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5. 꽃을 꺾지 않았던 사람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일을 무척 두려워하셨다고 하셨다. 본인의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늘 조심하셨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도 강하게 대하지 않으셨고, 심지어는 길가의 꽃 한 송이도 함부로 꺾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꽃은 누군가 꺾지 않았기에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조심스러움이, 결국 누군가의 안식을 만든다. 할머니가 살아오신 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자기 감정이나 욕망을 앞세우기보다, 다른 이의 평안을 더 먼저 생각했던 삶.

그런 삶이 가끔은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로움조차 품어낸 사람.

6. 말은 품고, 사람은 보듬는다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은 매번 마지막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이 마지막일까.

그런 생각들이 내 마음을 조금씩 무겁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 하루가, 그 몇 시간의 방문이, 정말 소중하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다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입 안에 머물러야만 하는 말도 있다.

할머니는 늘 그런 분이었다. 말을 아끼셨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무게가 있었다.

나는 아직 그런 말들을 잘 하지 못한다. 대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꽃은 꺾지 않고 바라보며 살자.
말은 쏟지 않고 품으며 살자.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보듬으며 살자.
그래서 언젠가, 누군가의 마당 어귀에 조용히 피어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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