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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순응 (2)

무기력이 햇살보다 익숙해졌던 날들의 기억

by 희소


태양이 끓었다. 바람은 달콤했다. 그래서 밖을 나서기 싫었다. 문고리는 무겁게 느껴졌고 수 시간 손이 닿지 않아 차가워진 철제의 손잡이는 날더러 잡지 마라 으름장을 놓았다. 문 너머, 바깥세상이 주는 차가움을 미리 내게 경고하는 듯했다. 나는 저 고집 센 손잡이를 끝내 이겨낼 자신이 없다. 마음으로 몸으로 한참 밀어내다보면 어느 틈에 자연스레 열려있다. 문이라는 분께선 어딘가 공포스러운 구석이 있다. 처연하게 정지해 있으면서도 내가 있는 이 공간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뻔뻔한 장치로 존재한다. 입체에 머무르면서도 겸손하게 평면을 지향한다. 이 낯 두꺼운 널빤지를 뛰어넘고 나면, 아무래도 덜 익숙한 미지의 공간이 내 앞을 맞이한다. 문은, 그 공간과 내 공간을 순식간에 폭력적으로 연결해 버린다. 문이 열려있는 순간, 내 방은 - 더 이상 방이라는 공간으로 정의할 수 없는 - 어떤 하나의 낯선 광장처럼 느껴진다. 두 걸음만 뒤로 가면 존재할 나의 안락함이 짓밟히고 일순간 노출된 동시에 그 공간을 이루던 냉기가 내 뺨부터 무릎까지 구석구석 감싸고 스친다. 그래, 이 따뜻함을 뒤로한 채, 온 힘을 다해 방문을 열고 나서면, 눈앞에 마치 그림처럼 완벽한 공간이 존재한다. 불은 꺼져있지만 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사방으로 요란히 죽죽 뻗어댄다.


적막한 주방에 내 발바닥을 잡아채는 불쾌한 장판의 신음이 차오른다. 선반의 냄비를 꺼낼 때, 식기끼리 부딪히는 소음을 가급적 외면하고 싶다. 늘 그랬듯이 머리채를 잡아채인 후 무력하게 꺼내어지는 스테인리스 냄비를 성심껏 비웃는 소리, 깡, 깡, 깡. 이 반지하의 천장을 뚫고 기막히게 윗 층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 것만 같은 편집증적 망상. 오후 12시 20분, 귀여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한숨 돌리며 점심을 챙겨 먹을 시간. 식사 중인 그들의 귀에 냄비의 비명이 닿지 않기를 바란다. 수도꼭지의 물소리마저 파멸적이다. 수압을 낮추고 최대한 냄비를 가까이 가져다 댄다. 절대 윗집의 평화를 부수어선 안된다. 다만 또다시 스테인리스 냄비를 비웃듯 틱틱대는 가스레인지 소리가 퍼진다. 일말의 인지 없이 그저 손이 이끄는 대로 맡기다 보면 라면은 완성되어 있다. 다른 냄비들이 비웃고, 가스레인지가 비웃고, 어쩌면 윗집까지 비웃었을 그 라면을 입에 넣는다. 라면을 입에 넣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상의 비웃음도 모조리 함께 씹어 삼켜지는 것만 같았다. 냄비를 깨끗이 비워낸다. 이름도 효능도 모르는 영양제 몇 알을 집어삼킨다. 스스로에게 감사를 표한다. 라면 한 그릇으로 인해 이 공간이 내뿜는 아우성은 잠재워졌다. 이로써 앞으로의 내 6시간은 보장받았다. 가장 아늑한 곳으로 몸을 던진다, 최대한 빠르게.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난 절대 내가 우울하다거나 지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난 이 침대가 주는 편안함을 나 자신보다 사랑할 뿐이다. 너무 사랑해서 눈물을 흘리는 부모와 자식들처럼, 나도 사랑해서 가끔 눈물을 흘리곤 하는 게 내 어둠의 전부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인하고 아름답다. 나비가 되기 위한 번데기라는 둥, 요즘 사회에서 위로한답시고 뿜어져 나오는 그런 비유는 정말이지 궁상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비가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아름다울 뿐이다. 나는 그저 나다. 나의 아름다움을 믿는다. 나는 누웠음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내가 아름다울 수 있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내 처지를 안타깝게 보는 이들에게 콧방귀로 응수하는 것이 나의 복수이다. 내가 있음으로써 이 방은 나름의 적당한 온기를 가지고, 적당히 둥글어지고, 적당히 포근해진다. 나는 이 적당한 보통의 행복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얻거나 잃을 걱정과 욕심에서 해방된 이 상태야말로 무결한 형태의 평화라고 믿는다. 오히려 나를 방 밖으로 꺼내어내려는 오랑캐들이야말로 행복을 모르는 것이고, 자신이 영위하는 삶의 의미를 여전히 찾지 못해서 나를 훈계하고, 그 훈계로 인해 자존감을 얻어가려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번데기들이라고 생각한다. 가진다는 것은 가짐으로써 또 가지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끝이 없는 욕심의 굴레에 탑승하기보다, 난 이 지점에서 내가 어떤 철학적인 카타르시스를 점하는 것 같은 감각에 더욱 위대한 고양감을 맛보았고, 지금 내 자리에서 행복을 찾아내기로 결정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행복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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