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태피스트리를 짜자
인생을 살다보면 마음이 너무 힘든 순간이 찾아온다. 나 역시 그랬다. 병원을 찾아가서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서 먹기도했다. 증세가 나아졌기에 병원은 몇 번만 가고 그만뒀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면 병원을 계속 다니면 좋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하는데 솔직하기가 어려웠다. 타인을 신뢰하고 나의 마음에 대해 털어놓아야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차분함처럼 보이는 나의 성격이 우울함에서 기반한 것이라는 것을. 나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울해서 인생을 살기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감정의 밑바탕을 나름 분석해보면 우울함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얘기다. 우리 누구나 마음속에 우울함을 마음에 지니고 산다. 아무리 겉으로 밝아보이는 사람도 혼자 있을 때는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는 우울함으로 집에 들어오면 소파에 한동안 누워 있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내 안의 다른 목소리는 말한다. '이건 너무 답답해! 이게 정말 너라고 생각해?'라고 끊임없이 나에게 말한다. '알아. 이건 나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답한다. 다만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
이번 생은 어쩔 수 없기에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우울감을 지울 수 없으므로 어색한 밝음을 포기하자'고 말했다. 지금은 다르게 말해보고 싶다. '알 수 없는 우울감을 지울 수 없지만 앞으로는 내가 많이 느껴보지 못한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고. 만약 인생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다가 망쳐버리고, 칠판의 숙제를 빨리 적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초등학교 1학년의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살다보니 그런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희망사항이자 오만이었다.
어쩌면 나는 익숙함으로 우울함을 깊게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이제껏 그래왔기에 앞으로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과 함께. 그 감정은 나의 일부이므로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 당신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 우울하더라도 5분 후에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을 것이고, 맛있는 치킨에 몰두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 테니까. 그러한 순간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음미하자. 나에게 다가온 기쁨의 순간을 쉽게 흘려보내지말고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컴포트 존(Comfort Zone)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이는 낯선 세계로 뛰어들자. 컴포트 존이란 다른 말로 내가 이제껏 나를 알아온 공간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