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관조란 무엇인가
대학교 시절 고등학교 친구와 만나 술을 마셨다. 친구가 내게 말했다.
"예전에 너는 뭔가 벽이 느껴졌어. 친한 친구인데도 더 이상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 말야."
이런 말은 사회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선배에게도 들어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일부러 그들에게 벽을 치고 멀리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본능적인 방어 기제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알면 알수록 진국이다"라고 말해줬지만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덕분에 나도 내가 왜 그런지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체득한 삶의 생존 방식이라는 자체적인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 될 필요없는 어른이지만 5살 때부터 시작된 이 방어 기제를 쉽게 놓을 수가 없다. 이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나 보다. 아버지의 교통 사고로 시작된 집안의 불행은 5살인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내가 선택한 방법은 거리두기였다. 몇 년간 말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언제부턴가 나의 인생을 살면서도 관찰하는 듯한 이상한 모양새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삶의 방식이 몇 십년간 이어진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 조금은 슬프기도하다. 여전히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좌절스럽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관조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내 삶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자아가 있어서 이것을 못마땅해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들처럼 머릿속에서 쉴새없이 논쟁을 벌인다. 대부분 능동적인 성향의 A가 수동적으로 거리두기를 하려는 B에게 나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거야? 우리가 아직도 어린 애인줄 알아?"
그러면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C는 A를 말린다.
"아니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잖아.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 더 부드럽게 얘기해 주자."
그러면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이들을 훠이훠이 떨쳐내며 "다들 그만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니까."하며 논쟁을 일축시킨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관조라는 것은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관조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최진석 교수님은 책 <경계에 흐르다>에서 장자에 의하면 "자신을 비워낸 자아는 관조적 태도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텅 빈 마음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담아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과연 나의 소유일까?
겸허한 마음으로 나를 내려놓고 보이는대로 바라보자. 상처는 내가 아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찰나의 찰과상이다. 내 것이 아닌 감정을 모래처럼 부여잡지 말고 세계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관조적인 인간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