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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Sep 27. 2021

툴루즈의 미국인 파티시에

Jan

        2020년 12월은 프랑스의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봉쇄기간이었다. 오후 6시 이후 통행이 금지되었고 레스토랑과 박물관 등 대중시설들이 문을 닫았으며 불어 어학원도 온라인으로 수업 중이었다. 더욱이 집에서 10km 이상 나갈 수가 없으니 다른 도시를 방문해 여행할 수도 없는 상황. 프랑스에 도착하면 긴긴 잠을 자고 싶었던 내 바람은 잘 실현될 줄 알았으나, 시간이 많으면 가만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들썩 일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이상한 성격은 불어 불능자가 구글 검색창에 불어로 검색을 하게까지 하는 기적을 낳았다. '뭘 하면 좋을까?' 하고 검색창에 Atelier Cusinier 입력하니 코로나로 가게 문을 닫았단다. 체르니 30번에서 포기한 피아노 수업을 계속 들어볼까 하고 집 근처 피아노 학원에 메일을 보내보니, 온라인 수업만 가능하단다. '집에 피아노가 없는데 가능할까요?'라고 답변을 보냈는데, 9개월이 지난 여태껏 답변이 없다. 

        

        운명이었을까? 미술학원도 도예 학원도 바이올린 학원도 다 문을 닫았고, 혹시나 하고 Atelier Pâtisserie를 검색해보았는데, 한 곳 문연 곳이 있어 현지인을 대동하고 찾아가 보았다. 이름은 Labo&Gato이름도 귀엽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손 소독을 하고 들어가니 오른팔에 거품기 모양의 문신을 새긴 한 남자 직원이 반긴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곳은 파티스리 용품점 한켠에 마련된 아뜰리에로 사업자 등록증에 학원이 아닌 '상점'으로 등록되어 있어 다행히 수업이 가능하단 꼼수의 비법을 알려준다. '저 불어를 잘 못하는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꺄르르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우리 셰프는 미국인이에요!!' 4시간짜리 80유로에 2가지 Bûche de Noël을 만드는 수업. Bûche de Noël 이 뭐지도 모른 채, 불어가 모르면 영어로라도 물어볼 수 있겠지 하는 용기로 등록하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유튜브로 Bûche de Noël 이 대체 뭔지 찾아보았다. 나무 통나무처럼 생긴 케이크로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에 꼭 먹는 케이크. 몰라서 용감했던 건지 롤케이크 같이 생긴 게 동영상을 봐도 봐도 무지 어렵게만 보인다. 과연 따라갈 수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첫 수업 날이 다가왔다.


        수업에 들어가니 나까지 8명의 학생이 아뜰리에를 가득 채웠다. 자녀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수업을 등록해주어 왔다는 귀여운 노부부, 모녀지간, 친구들끼리 온 학생들. 그리고 어리둥절 뻘쭘하게 혼자 와 긴장하고 있는 외국인인 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불어 레시피를 보니 눈이 핑핑 도는 기분이다. 그리고 등장한 중년의 백인 여성. Bonjour! 작은 체구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이름은 제인 Jan.  


        수업은 재미있었다!!! 패션 프루트와 망고로 맛을 낸 무스케이크 스타일의 부쉬와 피스타치와 프랄린, 생크림으로 장식한 부쉬 2가지를 만들었다. 설명을 듣고 시연을 보고 직접 만들어 보다 보니 정신없이 예정보다 1시간이나 더 지난 5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 때문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정신없이 걸어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5시간의 수업시간 내내 영어는 인사말밖에 듣지 못했던 것은 좀 찝찝했지만, 디저트는 밥 먹은 후 먹어야 한다는 현지인의 규칙도 깨고 맛을 보았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진짜 맛있는 케이크의 맛. '아! 프랑스 파티스리가 이런 맛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인터넷으로 수업 10회권을 결재했다. 프랑스 살이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은 한 번에 결재하기 벌벌 떨 돈이지만 유로의 가치를 잘 모르던 초기 프랑스 살이 여행자 모드의 나에게 500유로는 무덤덤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난 그 이후로 파리 브레스트, 오페라 케이크, 생 또노레, 타르트, 갈렛트, 마카롱, 까눌레 등등 20회가 넘는 수업을 들었다. 불어학원보다 프랑스 현지인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수업이라고, 레시피를 독해하다 보면 어휘 실력도 크게 향상될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그렇게 20회의 수업이 지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매번 출석도장을 찍는 장기 수강생과 선생님은 친해질 수밖에 없다. 제인은 50대 중반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미국에서는 국제 정치학, 경제학 석사를 한 인재였다. 박사 과정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학문이 그 전처럼 재미도,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고향에 돌아가 요리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책상에 앉아 숫자만 보던 그에게 손으로 일하는 즐거움은 꽤나 컸나 보다. 대학시절 배운 불어만 믿고 프랑스 유학행을 결심한 그녀. 그동안 모은 돈을 투자해 INBP에서 제빵을 공부했다. 그리고 얼마 후 프랑스인과 결혼해 시골마을에서 빵집을 열고, 제과를 공부하고, 그리고 헤피엔딩일 줄 알았는데, 이혼 중이라는 결론. 끝은 좀 당황스럽지만 프랑스 생활 10년 차에 불어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프랑스 페이스트리를 가르치는 그녀는 나의 멋진 첫 셰프이다.  아뜰리에에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몇 달 되지 않은 초보선생님이라는 그녀는 교사인 내가 볼 때 수업 준비를 아주 많이 하는 노력파이다. 그녀의 수업이 돈이 아깝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나도 참, 찝찝함은 씻어내야 적성이 풀리는 나는 질문을 했다. '수업시간에 영어로 가끔 제과 방법을 설명해주면 안 되나요?' '미국에 살 때 집에서 요리는 한 번도 안 하던 사람이 프랑스에 와서야 밀가루가 뭔지 저 조리도구가 뭔지 다 처음 불어로 배워서 그런지 영어로 뭔지 잘 모르겠더군요.' 웃프지만 제법 설득력 있는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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