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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Oct 10. 2021

어쩌다 실업자

Pôle emploi 등록하기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범대 졸업생이 프랑스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될 때면 머릿속 뿌연 단어들을 끄집어내어 글씨를 써 보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식탁에 놓인 전기세 고지서 편지 봉투를 뒤집어 끄적여본다. 대한민국 4년제 사범대학 특수교육과 중등특수 전공. 정교사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대학시절 아일랜드 캠프힐에서 1년, 미국 캔자스에서 교환학생 1년, 미국에서 아동극 동아리 활동에 빠져 방송 관련 일을 하고 싶어 홈쇼핑 채널 소도구 팀에 기웃,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조연출로 기웃하다 대학 졸업 후 한국 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자로 탄자니아에서 2년 동안 특수교사로 활동. 한국에 돌아와 5년 가까이 한 특수학교에서 근무.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 글로 써보니 나의 20~30대는 안정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길을 참 열심히도 걸었던 거 같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잘 살았다 칭찬해주고 싶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지만 프랑스에서 살기 위해서 가장 필수인 불어는 이제 막 초급 수준을 벗어난 Delf B1. 대학원을 가려면 1~2년은 더 불어공부에만 매진해야 가능한 일이고, 30대 초반 임신과 출산, 육아까지 생각하면 몇 년간의 경력단절도 고려해야 한다. 그 말인즉슨 '나랑 안 맞으면 그만두지 뭐!' 하고 배짱부릴 수 있는 20대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짚어 줄 사람이 필요하단 생각 끝에 마리나가 알려 준 pôle emploi 고용노동부 사이트에 demandeur d'emploi(구직자)로 등록하고 상담을 신청했다. 후기들을 찾아보니 취업에 필요한 코칭이나 언어교육들을 무료로 제공해주기도 한다는 말에 살짝 부푼 마음을 가지고 상담일을 기다렸다. 상담 날 10분 일찍 도착해 convocation(개인면담 시간 확인서)을 보여주고 로비에 앉아 기다리니 상담자가 시간 맞춰 내려와 2층의 상담실로 안내한다. 그리고 이어진 2시간의 상담.


        첫 한 시간은 자기소개와 함께 구직사이트에 올린 내 프로필이 맞는지 수정하고 구직자로 공식 등록하는 절차를 거쳤다. 프랑스에서 일한 경험 즉, 고용보험료를 낸 이력이 없으니 구직 수당은 받지 못하지만 다른 기타 서비스를 계속 받으려면 매달 구직상황을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한다. '저, 프랑스에서 특수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정해진 상담 시간이 끝날까 초초한 마음에 모자란 불어로 어렵게 문장을 만들어 물어봤다. 다행히 길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후에. 


        '네?' 

        프랑스에서 '공무원'이 되기 위해선 즉, 공립학교에서 특수교사로 일하려면 프랑스인이어야만 한다. 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공공행정기관에서 말이다. 박애 자유 평등 그리고 종교 세속주의 등 프랑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화국의 가치들을 후대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사라면 기본적으로 이 사상들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나 또한 원어민 교사들을 빼놓고 대한민국 어느 학교나 동사무소에서 외국인 직원을 본 기억이 없다. 더욱이 난 프랑스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는데. 그러고도 다시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임용고시를 치러야 하니 프랑스에서 특수교사가 되려면 족히 10년은 걸릴 듯하다. 더욱이 10년 후에 과연 내가 불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런지, 불어로 학부모 상담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니 솔직히 자신이 없다. 물론 특수교사가 아닌 AESH라는 한국의 활동 보조사/특수교육지도사 격인 직업은 외국인도 할 수 있다. 이 또한 불어를 유창하게 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마스크를 써서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텐데도 눈빛에서 나의 실망을 읽었는지 상담가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내가 즐거운 일,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살게 되더라도 다시 언어 장벽을 부딪히지 않아도 되는 일,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어도 가족들에게 주변 친구들에게 예쁜 케이크 하나쯤은 거뜬히 만들어 줄 수 있는 일, 프랑스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일, 정년을 생각하지 않고 내 일자리를 나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일... 문득 이 모든 것들을 충족하는 것이 '파티시에'란 생각이 스쳤다.


         상담을 마치고 고용노동부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는 내 손에는 stage(인턴쉽) 계약서 양식이 들려 있었다. '이왕이면 상상만 하지 말고 현장을 겪어보자! 진짜 해볼 만한 일인지, 나와 맞는 일인지 부딪혀 보자!' 한국인 특유의 소뿔도 당김에 빼자 정신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32살 불어 초보자의 프랑스에서 제과 인턴쉽 찾기 여정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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