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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Dec 21. 2021

Apprenti(어프헝티)로 살아남기

열여섯 그리고 스물한 살의 겨울

        겨울이다. 어느덧 일을 시작한 지, 그리고 제과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지난 3개월 간 나의 스케줄은 대략 이러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20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서, 5시부터 근무를 시작하고 오후 12시에 일을 마치면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불어 수업을 듣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해서 저녁을 먹고 씻고 바로 쓰러져서 잠이 드는 스케줄. 제과학교에 가는 주간에는 기차를 타고 학교까지 가는 길이 멀어서 그렇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꼬박 수업을 듣는 스케줄이 오히려 휴가라고 여겨질 정도로 한가롭게 느껴졌다. 바쁜 일상만큼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지난 3개월 간 체력소모가 큰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크림을 맛보고 갓 구워진 크로와상 냄새를 참을 수 없어 매일매일 달달한 것들을 입에 달고 사느라 몸무게가 늘었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하루 종일 거의 서서 일하느라 그런지 다리도 튼튼해지고, 무거운 재료들을 들고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팔에도 볼록하니 근육도 생겼다. 지방 대신 근육이 붙은 거라 몸무게가 늘었다고 믿고 싶지만, 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 김삼순이 통통했는지 알 것도 같다. 세상엔 맛있는 케이크가 너무나도 많으니까! 심지어 직업병도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탱탱 부어 주먹을 쥐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오른손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 한동안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특수교사로 일할 때도 물론 학생들 휠체어를 밀거나 화장실 신변 지도를 할 때 허리를 많이 쓰곤 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근육을 써야 하니 몸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나보다. 힘든 정도를 설명하자면 마치 학생들을 인솔해서 에버랜드로 매일매일 현장체험학습을 다녀오는 느낌이라고 말하면 현직 교사들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겨울이 되면서 자전거로 출근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드문 툴루즈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은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다. 춥고 습한 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출근길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은 온 길을 밝혀 주는 환한 크리스마스 장식 덕분이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거리에 밝혀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노라면 이게 웬 호사인가 싶을 때도 있다. 왠지 나만을 위해 불을 밝혀 주는 건 아닐까 착각까지 하며 오늘도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굴린다. 새벽 출근을 하다 보면 매번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에게 서로 격려의 눈빛을 보내곤 한다.   

출근길을 환히 밝혀주는 크리스마스 장식들. 찬란하고 따스하다.
갓 구워진 크로와상과 빵 오 쇼콜라를 매장으로 한꺼번에 옮기기 위해서는 30킬로가 넘는 무게도 감당해야 한다. 혹여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매번 긴장하게 된다.  

        학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학생들에겐 période d'essai 즉, 정식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기간이었나 보다. 나는 다행히도 이 기간을 넘겼지만 같은 반 한 학생이 해고를 당했다. 지나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바쁜 크리스마스 기간에 해고를 감행한 회사의 입장은 둘째 치고서라도 16살 어린 학생에게 해고는 너무나도 일찍 맞본 인생의 쓴 맛일 것이다. 학교에서는 6개월 동안 학생이 다른 회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지만, 회사를 찾는 것은 오로지 학생의 몫이다. 더욱이 동네 유일한 빵집에서 해고를 당한 경우라 툴루즈 시내에 방을 구해 혼자 사는 것도 고려중이라니 16살 이 학생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운 겨울로 기억될 것이다. 나였다면 정말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좌절했을 텐데 시간이 많아 집에서 만들고 싶어 했던 케이크를 잔뜩 만들어서 좋다고 말하는 학생을 보니 꽤나 근성이 있는 친구다. 6개월 이후에도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면 학교도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된다니 꼭 찾아서 같이 졸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재에 나온 주방의 체계. 사장 다음 셰프 그리고 부셰프, 정규직 파티시에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있는 어프헝티. 군대 질서만큼 명확한 주방 체계에서 어프헝티는 막내 중의 막내이다.

        아나이스는 내가 반을 옮기고서 만난 절친이다. 21살 그녀는 중학교 졸업 이후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마트 캐셔 일 등을 전전하다 파티시에가 되기로 결심했다. 집도 가까워서 실습 날이면 짐이 많아 차도 얻어 타고 신세를 참 많이 진 고마운 친구다. 그런데 회사에서 월급을 적게 지급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어프헝티와 갈등이 생겨 며칠 째 병가를 내고 다른 빵집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에 학교에서 업체에 직접 찾아가 문제를 중재해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한국에서 현장실습 나간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최소 한 달에 한 번 업체를 찾아가 업무 환경을 점검하고 담당 직원과 상담하곤 했는데, 이에 비해 학생들을 방치하다 시피한 프랑스 학교 시스템이 정말 아쉽다. 아나이스의 이력서에는 경력이 참 많다.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직업을 바꾼 이유에서다. 파티시에는 그녀 생에 있어 처음으로 가장 오래 일하고 싶은 일이라는데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안타까웠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던 나의 열여섯, 스무한 살의 겨울은 우리 반 학생들의 겨울에 비하면 참 평이로운 겨울이었던 거 같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일도 많아졌다. 남들 쉴 때 더 바쁜 직업이라더니 이 대목이 유독 실감 나는 요즘이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인 bûche de Noël (부쉬 드 노엘)을 먹을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2021년 나의 서른두 살의 겨울은 무척 추웠지만 그래도 장작 나무를 닮은 케이크처럼 달콤하고 따스한 겨울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열여섯, 스물한 살 어린 친구들의 겨울도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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