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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Feb 21. 2022

Chef d'œuvre

나는 파티시에가 되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제과학교에 입학한지도 어느새 6개월이 지났다. 긴 것만 같았던 CAP 2년 과정 중 4분의 1이 지나고, 첫 1학기 성적표도 받았다. 학교 내신 성적은 CAP 자격을 취득하는데 큰 역할을 하진 않지만, 20점 만점에 10점만 넘기면 만에 하나 CAP 시험을 망쳤을 상황에 만회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된다고 한다. 약간의 보험인 셈이다. CAP 자격증 취득 이후에 더 높은 상위 과정을 지원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할 때도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고 하니 사실 좋은 성적을 받는 게 손해는 아니지만 덕분에 매주 쪽지 시험을 준비하는 게 꽤나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다. 시험 난이도가 한국의 중학교 수준이라 크게 어렵지는 않으나 낯선 불어로 공부하려니 스펠링 하나하나 틀리지 않게 신경 써야 한다. 


        한번 본 단어는 까먹고 또 까먹는 나이이지만, 나이 들어서 공부를 해서 좋은 점은 뭐가 시험문제로 나올지 눈에 훤히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4년간 특수학교에서 공통교육과정을 다루면서 매 학기마다 시험 문제를 만들어냈던 게 은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무슨 문제를 낼까? 하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콕 집어서 외워야 하는 게 눈에 보인달까? 대학 신입생 때 다른 일을 하다 다시 수능을 봐서 늦은 나이에 새내기들과 공부하던 30대 언니 오빠들이 매번 성적 장학금을 휩쓸어갔던 까닭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연애나 알바 등에 허덕이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 상황이 안정되어 있거나 오히려 상황이 더 절박했던 덕분이었으리라. 지금의 나의 경우는 전자일까 후자일까?


        나의 1학기 성적은 20점 만점에 16.17점이 나왔다. 특이사항으로 Apprentie sériuse et motivée 진지하고 동기가 가득한 학생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으니 열심히 학교를 다닌 보람이 있다. 같은 반 학생들 중 가장 최고점이 16.60점, 가장 최하점이 7,79점이니 중간 이상은 한 셈. 16살 17살 학생들과 경쟁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나 싶지만, 프랑스에서의 첫 해 나름 열심히 잘 살았다고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늘 정신없고 시끄러운 녀석들이지만 케이크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우리 반 꼬맹이들과 1학기 무사통과를 기념해서 사진도 찍었다. 밑에서부터 난독증이 있어 나만큼 불어를 어려워하는 폴, 나를 제외한 우리 반 유일한 성인인 21살 알리시아, 여우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잘란, 유튜버를 꿈꾸는 레오, 아스퍼거가 의심되는 거북이 루카, 말썽쟁이 하시드, 인기쟁이 알렉 그리고 자칭 아웃사이더 제레미까지 이렇게 함께 실습을 같이하고 있다. 시끄럽고 난리법석이라 특수학교 제자들을 떠오르게 하는 녀석들이지만 매달 볼 때마다 반갑고 파티시에로 성장하는 모습이 기대되는 친구들이다.   

        실습과 테크놀로지 수업을 제외하고 가장 신경 쓰이는 수업이라면 단연 chef d'œuvre라는 수업을 꼽을 수 있다. chef-d'œuvre의 본 뜻은 작품이라고 해석되는데, 일주일에 단 한 시간 들어 있는 수업이다. 이 수업시간은 선생님도 따로 배정되어 있지 않고 자율학습 시간처럼 스스로 꾸려나가야 하는데, 나는 이 시간에 프랑스어 점자를 공부하고 있다. 웬 프랑스어 점자? 이 수업의 평가는 1년 반 후 CAP 시험 때 5분 프레젠테이션과 5분의 심사위원 질의응답 총 10분간 진행되는데, 이 시간 동안에 파티시에가 되어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한다. 동영상이나 ppt 파일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발표할 내용 5장 정도의 종이만 들고 갈 수 있다고 한다. 


        파티시에가 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2년 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특수학교에서 일하며 종종 학생들이나 학부모, 동료 교사들을 대상으로 제과 수업을 하는 모습? 빵집 사장님이 되어 전공과 학생들을 고용하는 모습? 서래마을 프렌치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 프랑스에 남아 계속 제과 제빵 공부를 하는 모습? 아직 구체적인 모습은 그려지지 않지만 내 과거의 일부였던 장애학생들과 어우러진 삶을 살고 싶다. 한국 교육현장이었다면 '닥치고 공부나 해! 시험에 합격한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라고 다그쳤겠지만, 늘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에서는 공부하는 내내 도대체 왜 이 공부를 하는 건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내 프로젝트는 일단 시각장애학생들에게 제과 아뜰리에를 가르치는 것이다. 탄자니아와 한국에서 만난 시각장애학생들이 시각 대신 미각이 유독 발달해서일까?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어떻게 만드는지 굉장히 궁금해하던 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은 1년여의 시간 동안 점자 홍보물도 만들고, 불어 점자로 레시피도 번역해보고, 보조기기는 뭘 사용하면 좋을지, 실제 어떤 케이크가 시각장애학생들과 함께 하기 쉽고 재미있을지 직접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하다가 너무너무 어려우면? 엣다 모르겠다 하고 다른 프로젝트로 바꿀지언정 말이다. 

              

불어 점자책과 대략 만들어 본 시각장애인 대상 제과 아뜰리에 홍보 전단지

    참고로 우리 반 학생들의 프로젝트는,

- 빵집 오픈하기

- 획기적인 케이크 상자 디자인하기

- 세계 제빵 레시피 책 발간하기

- 모찌 레시피 소개하기

- 파리 브레스트 레시피 변형하기

- 제과 유튜브 채널 운영하기

- 제과 인스타그램 채널 운영하기 등등이 있다. 이에 비해 내 프로젝트는 너무 소소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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