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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May 21. 2022

시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D-365

        추운 새벽 출근길에 패딩으로 무장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잠시 봄이 오더니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울 거라더니 5월밖에 안됐는데도 30도가 훌쩍 넘었다. 덕분에 뜨거운 더운 여름날 오븐 앞에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감하고 있다. 아침에 냉장고에서 꺼낸 버터가 얼마 후에 녹아버리는 건 보통이고 생크림을 올릴 때도 금세 부피가 내려앉아 애를 먹는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냉동고에 케이크를 넣었다 뺐다 하는 동안 쐬는 잠깐의 차가운 냉기가 일하는 동안 제일 좋을 만큼 여름의 주방은 마치 찜질방 한증막 같다. 그래도 때 이른 더위활짝 핀 꽃들 덕분에 힘든 출퇴근 길에 소소한 위로가 된다. 활짝 핀 꽃 옆을 지나가노라면 진한 꽃향기에 땀냄새와 빵 냄새에 지친 후각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     

집사의 슬리퍼를 베게 삼아 자는 귀여운 고양이. 퇴근길에 만난 게으른 고양이만큼 부러운 존재도 없다.


        5월에 되었다는 건 프랑스에서 시험기간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3월에 학기가 시작해 11월에 수능을 치르는 한국과 달리 이곳은 9월에 학기가 시작해 5월이면 지난 1년을 마무리하는 시험을 치른다. 제과학교와 함께 시작한 대학 부설 어학원 3학년의 학기말 시험도 모두 끝났다. 퇴근하자마자 바쁘게 어학원으로 달려가지 않고 대신 동료들과 맥주 한 잔도 기울이고 다른 빵집도 기웃거릴 여유가 생겨서 좋다. 더운 날씨에 체력소모가 컸는데, 한편으로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줄어 다행인셈이다. 하지만 2년 과정이라 여유가 있는 나와는 달리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1년 과정의 클레유와 MC 과정의 로렌의 사정은 좀 달랐다. 

회사로 전송된 로렌의 시험 꽁보까시옹과 MC과정 실습작품

            MC 과정 (Le pâtissier-glacier-chocolatier-confiseur, titulaire de la mention complémentaire)은 CAP 상위 과정으로 케이크, 아이스크림, 초콜릿, 잼 등을 이용해 레스토랑 디저트를 창의적으로 제조하는 걸 목표로 하는데, 시험도 미술 시험시간에 디자인한 그대로 접시 위에 디저트를 재연해내는 것이 과제로 나온다고 한다.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로렌이라 시험에 큰 부담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험 전 주에 급작스레 병가를 냈다. 전날까지 별일 없이 웃으며 같이 일했는데 남은 직원들로서는 당황스러웠다. CAP 시험을 준비하는 클레유가 귀띔해준 바로는 회사 분위기가 5일간의 시험 준비 특별휴가를 사용하기 어려운 분위기라 아프다는 핑계를 댄 것 같다고... 클레유도 다른 동기들처럼 휴가를 쓰고 싶지만 지난번 아이가 코로나에 걸려 다른 특별 휴가를 쓰는 바람에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일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내년에 내가 꼭 쓰길 바란다며 사진을 보내줬다. 이런 휴가가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있어도 마음껏 못쓰는 건 쿨한 프랑스 사람도 마찬가지 구나란 생각에 조금 아쉬웠다. 휴가에 적극적인 프랑스인이라는 이미지는 대체 어디로 갔나요?   

        

어프헝티들의 법적 휴가를 설명하는 웹사이트. 어프헝티도 일반직원들과 같이 5주간의 휴가, 출산휴가, 시험전 특별휴가를 쓸 수 있다고 나와있다.

        클레유도 시험 준비로 많이 지쳐 보였다. 심지어 내게 2년 동안 준비할 수 있어서 부럽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본인에게도 불어는 외국어라 이론시험 준비가 쉽지 않은데 일도 하랴, 육아도 하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처럼 영어, 수학, 역사, 불어 시험까지 준비하지 않아도 되잖니?'라는 말을 위로라고 건네긴 했지만 1도 안 통하는 눈치였다. 안 피우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고. 정해진 시간 안에 손을 빨리 움직여 케이크를 만들어야 마지막 데코레이션에 시간을 더 소요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같이 일할 때면 나보고 빨리빨리 하자고 재촉까지 한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늘은 것도 힘든데 그녀의 시험 긴장감까지 같이 전달되어 같이 일하는 일주일이 심적으로 즐겁지는 않았다. 시험아 어서 끝나라!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주방에 낯익은 손님이 찾아왔다. 무슈 펠티에. 제과학교 교수님이 방문한 것이었다. 학교에서만 보던 교수님을 주방 한가운데에서 만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르며 반겼다. 한편으로는 구석구석 지저분한 주방을 날것 그대로 보여드리는 게 좀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런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교수님, 이론과 현실은 왜 항상 다른 걸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찰나 언제나 당당하고 기품 있던 교수님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셰프 아따나스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교사 시절 현장실습 나간 학생들을 확인하러 산업체에 방문할 때 내 모습도 생각나 교수님이 묘한 동질감도 느껴졌달까? 저도 한 때 그랬지요... 교수님이 온 이유는 시험을 앞둔 로렌과 클레유 때문이었다. 업장에서 평가하는 파티시에로서 로렌과 클레유의 자질을 상담을 통해 체크하고 점수화하는데 대략 30분 정도 상담하고 가셨다. 귀가 자꾸 상담하고 있는 문닫힌 창고 쪽으로 갔던 건 안 비밀.    


        내년 5월이면 나도 파티시에로서의 자질을 평가받는다. 1년 동안 불어가 더 많이 늘어있기를, 그리고 좀 더 자신감이 붙기를. 아, 나도 점점 긴장이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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