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장에선 무슨 일이?
BTM Chocolatierie 시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유학생을 위한 학교 측의 배려였을까, 하루 먼저 Commis 꼬미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먼저 접해본 덕분에 우왕좌왕하는 다른 commis들과 달리 바로 일에 투입할 수 있었다. 오전 7시부터 먼저 와서 시험을 시작한 로망은 어제 만들어 둔 pate d'amande 아몬드 반죽에 색소를 넣어 예쁘게 과일 모양으로 빚어둔 상태였다. 여기에 고농도의 시럽을 적셔 표면이 자잘한 설탕 결정으로 만드는 Candir 캉디르 작업을 할 차례였다. 그전에 내가 할 일이 있었는데, 과일시럽을 녹말가루 틀에 부어 40도 온도에서 5시간 동안 굳힌 bonbon(봉봉;사탕)을 꺼내 솔로 겉에 묻은 녹말가루를 털어내는 일이었다. 로망이 시럽을 정성스레 달이는 동안 나는 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하는 마음으로 봉봉을 꺼냈다. 실습실 오븐 한편에 늘 있는 이 하얀 가루의 정체가 늘 궁금했는데, 이게 사탕을 만들 때 쓰는 도구라는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기계가 사람 대신 케이크를 만드는 오늘날 옛날 방식 그대로 사탕을 직접 만드는 걸, 그것도 시험장에서 경험해보니 전통을 고수하는 프랑스의 고집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봉봉 조직이 가운데는 아직 물컹해서 조심했어야 했는데, 조심하는 와중에도 깨진 봉봉 하나를 로망이 먹어보라며 건넸다. 아직 따뜻한 사탕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녹아. 이걸 다시 시럽에 담갔다 꺼내면 겉이 거칠거칠한 봉봉 완성!
시험장엔 13명의 수험생과 13명의 꼬미, 그리고 12명의 심사위원, 그리고 2명의 교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교적 젊어 보이는 검은 유니폼을 입은 6명의 심사위원은 수시로 수험생들의 작업을 관찰하고 질문을 건넸다. 나머지 6명의 심사위원은 흰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경력이 매우 많아 보이는 분들이란 게 느껴진 게 그중 한 명은 MOF (Meilleur Ouvrier de France)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학생들이랑 구글로 찾아보니 Philippe Urraca라는 유명한 셰프 파티시에였다. 나한테 다가와서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봐서,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니 '파리바게뜨 알아요?'라고 물어봐서 웃으며 안다고 하니 윙크를 보내곤 휙 하고 사라지셨다. 다른 한 분은 한국 꼬르동 블루에서 강의를 했었는데, 대구에 지인이 최근에 디저트 가게를 창업했다고 꼭 한 번 찾아가서 일해 보라며 갑작스러운 취업 제안을 받았다. 시험 끝나고 명함을 받아가랬는데, 꼬미들은 갑자기 다 나가라고 해서 명함을 받지 못한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대구에서 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걸까...? 흰 유니폼의 심사위원들은 젊은 쇼콜라티에 후배들을 보는 것만으로 신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작업 방식이나 기술이 보이면 어린아이처럼 수험생에게 가서 물어보고 다른 심사위원과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 시험이 단순히 수험생을 평가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이 직업군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의 축제의 장처럼 느껴졌다. 이 시니어 심사위원들의 중요한 임무는 마지막에 결과물을 맛보고 평가하는 일이었다. 이 맛있는 초콜릿들을 오감으로 느끼는 일이라니, 임무이자 특권이렸다.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초콜릿 작업은 CAP 파티스리 과정에서는 약간의 데코레이션 이외에는 접할 일이 없기 때문에 수험생들이 쓰는 전문 용어나 사용하는 작업도구 모두 생소했다. 대리석 테이블 위해서 초콜릿을 템퍼링 하며 적절한 온도로 내려주며 안정화시키는 작업도 마치 행위예술을 보는 듯했다. 시험의 맨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역시 초콜릿으로 pieces montes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었다. 동영상으로만 접하던 아모리 기숑 Amaury Guichon의 초콜릿 작품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초콜릿 하나하나를 만드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무너지지 않게 무게 중심을 잡으며 잘 고정시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서는 결코 불가능한 작업이었으리라. 로망의 불상 장식품 장식인 나무줄기를 형상화한 초콜릿이 무거웠는지 중간에 톡 하고 부서졌는데 초콜릿을 아주 되직하게 시멘트처럼 녹여 부러진 부분을 두껍게 붙이고 나뭇잎 장식으로 그 부분을 가려주었다. 나는 식은땀이 다 흘렀는데, 로망은 조그맣게 '젠장'이라고 탄식하는 게 다였다. 초콜릿을 하려면 아주 침착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아주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가던 그를 잘 아는 교수님은 자꾸만 더 릴랙스 하라며 그를 다독였다. '이게 지금 흥분한 상태라고?' 같이 일하는 다혈질 니콜라스는 결코 초콜릿 작업을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불상처럼 생긴 이 초콜릿 불상은 실제 불상을 젤라틴에 넣고 굳힌 다음 불상만 빼내고 그 속을 초콜릿으로 채웠다. 실리콘으로도 할 수 있는 작업이지만 젤라틴이 머금은 수분이 초콜릿의 색을 진짜 불상 표면처럼 보이게 해서 젤라틴을 사용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약간 세월의 느낌이 나도록 초콜릿 가루를 살살 솔로 묻혀주니 정말 그럴듯한 부처님이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데, 한 후보자마다 한 테이블을 맡아 테이블을 지난 이틀간 만든 초콜릿과 사탕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초콜릿을 담는 그릇까지 초콜릿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멋졌을까. 마지막으로 불상을 옮기는 작업을 할 때면 모두가 두 손을 내려놓고 후보자 한 명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숨죽이며 지켜봤다. 딱 두 명의 작품이 옮기는 과정 중에 부서졌는데, 모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심사위원들이 프레젠테이션 룸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채점을 하는 긴 시간 동안 주어진 재료를 사용해서 불량품은 얼마나 나왔는지 그것마저 시험 채점 기준이라 남은 초콜릿 하나하나 플라스틱 상자에 넣고 라벨링을 하고, 그 와중에 로망이 건네 준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진짜 먹어도 돼?라고 물으니 더 많이 못줘서 미안하단다. 달콤 쌉싸름. 초콜릿에 원래 이런 다양한 맛이 있구나, 라는 걸 느낀 첫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난 초콜릿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초콜릿을 다 음미하기도 전에 모든 꼬미는 퇴장하라는 심사위원의 말에 로망에게 아쉬운 마음으로 악수를 건넸다. 지난 3일 동안 언어장벽 탓에 불편함이 많았을 텐데, 최대한 많이 가르쳐 주려한 로망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미리 준비한 핸드크림과 함께.
탈의실로 가는 길, 12명의 우리 반 꼬미들 모두 초콜릿과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 모두들 앞치마에 검은 초콜릿 자국이 가득했지만 잔뜩 상기된 얼굴엔 초콜릿을 배우고 싶다고 난리였다. 초콜릿이 원래 사람을 쉽게 흥분시키는 각성제이긴 하나 지난 이틀 동안의 경험은 초콜릿의 각성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내일은 BTM 파티시에 검정시험날이다. 진짜 시험처럼 최종 연습해보는 날. 그리고 2주 후 진짜 시험에 꼬미로 투입된다. 내일은 또 어떤 멋진 경험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