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재구성
06:35 시험을 치르는 당사자가 아닌 데도 잠을 설쳤다. 아침을 먹으며 연습 날 어떤 일을 했었나 머릿속으로 순서대로 떠올려 보았다. 잼을 만들고 키쉬 재료를 손질하고... 그리고 뭐였더라? 이래저래 생각을 하다 1~2분 평소보다 집에서 늦게 나왔더니 만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쳤다.
07:44 아침을 먹고 있었을 짝꿍에게 급하게 SOS를 보냈다. '이번 기차 놓치면 나 시험에 지각해!' 나 때문에 시험 떨어지면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할까 아찔했다. 재택근무 날이라 파자마 차림으로 아침을 먹던 짝꿍은 난데없이 호출을 받고 출동했다. 짝꿍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간신히 제시간에 기차역에 도착했다. 한국의 수능 날에는 경찰도 수험생을 데려다주는 법이라고!
08:07 Muret행 기차에 겨우 올라탔다. 13분 후 Muret역에 도착해 학교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09:50 위생복으로 갈아입고, 기호 3번 명찰을 달았다. 기차를 놓쳐 못 온 학생이 딱 한 명 있었는데, 이런 일에 대비해서 예비 Commis가 몇 명 더 배정되었기에 다행이었다. 호흡 한 번 제대로 못 맞춰 본 처음 본 Commis와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은 당황했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백배 천 배는 나은 법. 예비 Commis들은 지난 학기 동안 실습수업시간에 자주 결석했던 학생들로 비록 시험에 직접 참여하진 못하지만, 밀린 설거지를 돕고 공용으로 사용하는 저울이나 오븐 구역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09:00~09:15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Commis들은 보고 많이 배우세요!'라는 짧은 격려사로 시험 시작을 알렸다. 내 시험 파트너인 베누와와 지난밤 좋은 꿈을 꿨는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오늘 내가 할 일에 대해 상의를 했다. 지난번보다 한 가지 일이 더 추가되어 가능하면 점심시간 전 크로캉 부슈 케이크의 받침과 기둥으로 사용될 누가틴 Nougatine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번 연습 시험 때 계란 노른자며 물까지 모든 재료를 비닐봉지에 넣어 보관해서 깜짝 놀라게 만들었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계란은 따로 플라스틱 용기에 보관해두었다. 다른 밀가루, 설탕, 버터, 우유, 크림 등은 여전히 비닐봉지에 계량해서 보관해두었는데, 사람 고집이라는 게 참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어쨌든 설거지 양이 많이 주는 건 사실이고 딱히 결격 사유가 아니라면 이런 방법도 있는 거구나 하고 참고하기로 했다.
9:15~9:30 베누와가 pâte à choux를 만들 동안 내가 제일 먼저 하게 된 일은 레몬즙을 내어 계량하는 것이었다. 레몬즙은 뺑데피스와 과일잼 그리고 그의 스페셜티인 레몬 무스 쁘띠 가또 등 여러 군데에 쓰일 예정이다.
9:30~9:45 베누아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나는 키쉬 반죽과 헤이즐넛이 들어간 비스킷 반죽을 만들어서 냉장 보관했다.
9:45~10:00 뼁데피스 시연. 이번에는 다행히 베이킹파우더를 빼먹지 않았다. 지난번에 한 번 해본 터라 당황하지 않고 심사위원들 앞에서도 지시에 따라 만들 수 있었다. 영어를 사용해서인지 심사위원들도 엄청 질문을 많이 하지는 않고 레시피에 더 관심을 갖는 눈치였다.
10:00~10:20 베누아가 크로캉 부슈 장식으로 쓰일 sucre coulé 를 만들 동안 나는 브리오쉬 반죽을 시작하고 robot batteur를 계속 돌리며 그동안 설거지와 주변정리를 했다. 잼을 넣을 병도 오븐에 넣어 소독.
10:20~11:00 아몬드와 헤이즐넛 프랄리네 praliné 만들기. 캐러멜 라이즈 한 견과류를 믹서에 넣고 오래 돌리면 되는 일인데, 기름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리고 중간중간 잘 섞어주어야 하는 작업이다. 아몬드가 좀 많이 건조했는지 결국 식용유를 살짝 첨가해야 했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린 작업.
11:00~11:10 발효된 브리오쉬 반죽을 도마에 얇게 펴서 냉동실에서 휴지.
11:10~11:30 레몬 무스 쁘띠 가또 몰드에 크림을 넣고 얼린 다음 그 위에 헤이즐넛 프랄리네를 넣고 다시 얼림.
11:30~12:10 베누아는 봉봉 쇼콜라를 만들고, 그 사이 나는 오븐에서 나와 한 김 식힌 펭데피스에 나파쥬를 발라 윤기가 나게 하고 시나몬과 오렌지 과육 절임으로 장식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민트를 얇게 썰어 설탕과 섞고 이 설탕으로 잼을 만들었다. 지난번과 달리 냉동이 아닌 생과일을 사용했는데, 타지 않게 천천히 졸이면서 110도까지 올려야 했다. 다 완성되었을 때 차가운 접시 위에 한 방울 톡 하고 떨어뜨려도 안 흘러내리면 잘 완성된 거라고 한다. 이렇게 또 한 가지 배웠다 :) 문제는 냉동과일과 생과일의 수분함량이 달라서였을까, 정확히 잼 4병 분량이 나왔어야 했는데, 마지막 한 병이 200그람이나 모자랐다. 아무리 냄비를 긁어 모아도 어쩔 수 없는 일. 다시 시작하기엔 재료도 시간도 없는 상황. 한 병은 어차피 심사위원들 시식용이라고 하니 조금 감점되더라도 무사히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내 실수 때문은 아니었을까 괜히 미안했다.
12:10~12:30 냉동실에 휴지 시켜 둔 브리오쉬 반죽을 작은 덩어리로 나누고 공 모양으로 성형했다.
12:30~13:05 누가틴 작업 시작. 나는 예전에 아몬드 절편으로만 누가틴을 만들었었는데, 베누아는 아몬드 분태 가루를 사용했다. 작업하기가 더 쉽다고 한다. 150도 오븐에 계속 넣었다 뺐다 하면서 따뜻한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작업하는 게 중요한 팁. 그래서 다른 일은 접어두고 베누아가 작업하는 것을 옆에서 계속 도왔다.
13:05~13:15 설거지와 작업대 정리. 점심시간 시작!
점심시간. 하나밖에 없는 여자 탈의실에서 한 응시생이 눈물을 흘렸다. 뭐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는지 잔뜩 화가 난 모습이었다. 시험이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겠지만 지나간 일은 떨쳐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어쩌면 멘탈 관리의 방법이겠지? 서둘러 점심을 먹고 스트레칭을 했다. 3시간만 더 하면 자유다!
14:15~14:50 키쉬에 들어갈 호박과 파프리카를 손질하고 작게 썰어 올리브 오일에 볶아주었다. 다 볶은 후 베누와가 몰드에 반죽을 미리 성형해 둔 덕에 바로 볶은 채소를 나눠 담았다. 키쉬 크림도 만들어 냉장 보관했다. 지난번과 달리 냉동하지 않고 냉장 보관해두었다가 다음 날 구울 예정.
14:50~15:20 산딸기를 사용한 크렘 무슬린 만들고 바로 다음 오렌지 초코 케이크에 쓰일 초코 가나쉬도 만들었다. 점심시간 이후 오전보다 다들 작업 속도가 늦어졌다며 심사위원이 Dépêchez-vous!라고 외쳤다. 시험 볼 때도 빨리빨리 하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모두가 답했다. Oui, Chef!!!
15:20~15:50 크로캉 부슈에 쓰일 캐러멜을 만들어 오븐 팬에 넓게 부어 굳혔다. 크로캉 부슈를 어떻게 만드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이것은 내일 베누아가 혼자 작업할 일. 언젠가 배워볼 날이 오겠지?
15:50~17:00 그리고 한 시간에 걸친 뒷정리와 청소.
다행히 계획한 작업을 모두 끝냈다. 베누와는 내일 오전 중에 데코레이션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줄게 있다고 끝나고 잠깐 자기 보러 오라고 해서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레시피북을 준 것만으로 고마웠는데, 뭘 줄게 있다고?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가보니 다른 여학생들이 응시생들한테 수고했다고 돈을 받았다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적게는 30유로, 많게는 100유로 가까이 받은 금액도, 받은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베누아가 내게도 돈을 주려고 했었나? 선배가 신세를 진 후배들에게 밥을 사는 건 한국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돈을 직접 주고받는 건 참 신기한 문화였다. 우리 학교의 전통이라 이 응시생들도 CAP 1학년 때 시험에 참여하고 돈을 받았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내키지가 않아 기차 시간 핑계로 베누아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학교 문을 나섰다. 나중에 베누와가 진심으로 고맙다며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마음만이라도 참 고마웠다.
CAP 자격을 따고도 3년은 더 공부를 해야 취득할 수 있는 BTM 자격. 그리고 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첫인상에 실망도 하고 했지만, 나는 과연 3~4년 후에 이 수준까지 오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린다. 단순히 자격증이 목표가 아니라 일을 통해 내공을 많이 쌓아야만 이 만큼 양과 품질을 끄집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시험을 치른 응시생들은 어딜 가서도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낼 거라고 믿는다. 약간 허당기 있는 베누와 조차도 :)
오늘도 참 많이 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