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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Sep 18. 2022

정체성을 잃은 가게의 운명

Emily 영업 마지막 날

        9월 3일 토요일. 오랜만의 주말 휴무로 토요일 오전에 Jan이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만들기 아뜰리에에 참여했다. 오랜만에 만난 Jan과 지난여름은 잘 보냈는지 근황을 나누었다. 코로나로 정말 오랜만에 미국에 다녀온 그녀는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그 에너지 덕분이었는지 달콤한 아이스크림 덕분이었는지 집에 가는 길에 용기를 내어 파티스리 Emliy로 발길을 옮겼다. Emily는 내가 프랑스에 와서 처음으로 파티시에 인턴으로 한 달 동안 일했던 곳이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불어도 못 알아듣고, 일도 서툴었던 때라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때였다. 처음으로 새벽 출근이라는 것도 해보고 예쁜 케이크들을 만들어보며 파티시에를 꿈꿨던 그날들. 나름 2년 가까이 제과업종에서 일해보니, 이곳만큼 일하는 환경이 쾌적하고 최고급 식재료를 사용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케이크를 만드는 파티스리도 없었던 것 같다. 처음 접한 프랑스 제과점의 이미지가 좋았던 덕분에 지금까지 제과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1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다시 찾은 에밀리. 멀리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갓난아기를 안은 아이 엄마가 사장 에밀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 마리아구나!' 인턴이 끝나고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마리아와는 그녀가 아이를 낳기 직전 우리 집에 초대해 함께 밥을 먹었었다. 아이를 낳았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바로 고향인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소식이 궁금했던 차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봉쥬흐!'라고 외쳤다. 처음 이곳에 이력서를 들고 들어설 때만큼 심장이 떨렸다. 금방 나를 알아보는 마리아와 몇 초 만에야 내 이름까지 생각해낸 에밀리. 처음 에밀리에 반갑게 프랑스식 비쥬 인사를 하고 마리아의 4개월 된 아기와 첫인사를 나눴다. 품에 안은 아기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세상에 이런 좋은 향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케이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천재일 거라 생각할 정도로.          


        '오늘이 우리 에밀리의 마지막 날이야.' 우연도 참 기막힌 우연. 유독 오고 싶더라니. 용기를 내어 온 이곳에서 보고 싶었던 에밀리, 마리아, 아기를 본 오늘이 마지막 영업 날이라니 이상했다. 어쩐지 진열대엔 케이크도 없고 매장도 이상하리만큼 썰렁했다. 예약 손님이 마지막 케이크를 찾아가면 오늘부로 영업 종료. 모든 직원도 퇴사하고 에밀리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던 거였다. 출산휴가 중이던 마리아도 내일부로 실업자가 된 상황. 그녀들이 이 가게를 세우고 발전시키려 얼마나 애썼는지 알았기에 마음 아팠다.    

나의 첫 사장이자 셰프였던 에밀리. 
며칠 후 다시 찾아간 에밀리. 가게문은 여전히 꽁꽁 닫혀있고 우편물만 가득 쌓여있었다. 이 가게에는 이제 무엇이 들어올까?

        세 달에 한 번 다섯 가지 새로운 케이크를 출시하는 콘셉트의 에밀리는 내가 알던 파티스리와는 전혀 다른 모험을 하는 곳이었다. s사이즈에서 XL 사이즈까지 주문할 수 있었고, M사이즈 기준으로 5유로라는 비싼 가격에도 그녀가 사용하는 좋은 식재료의 값어치를 알았기에 수긍할 수 있었다. 내가 일했던 당시만 해도 새로운 콘셉트라는 신기함과 SNS 홍보로 제법 손님이 많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대중의 탓을 할 수도 있다. 파리도 아닌 지방 도시에서 이런 새로운 맛을 찾는 수요가 적었을 수도 있고 레스토랑에 납품하는 새로운 판로를 많이 개척하지 못한 마케팅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찾은 문제는 새로운 메뉴 개발에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메뉴를 바꾸는 건 재료나 도구는 물론이고 작업 시간이나 동선까지 깡그리 바꾸는 큰 일이다. 대부분의 제과점들은 에클레어, 플랑, 과일 타르트, 밀푀유 같은 고전적인 메뉴에 본인들만의 시그니처 메뉴들 위주로 거의 늘 같은 케이크를 판매한다. 대신 날씨가 더운 여름에는 과일 타르트류 종류를 더 많이 만들고 겨울에는 초콜릿을 베이스로 한 케이크를 더 많이 판매하거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시기에 신메뉴를 추가해서 생산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신메뉴를 출시할 때는 몇 번의 회의를 거치고 데코레이션에 피스타치오 분태를 뿌리냐 마냐의 문제까지도 계산기를 뚜드리는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메뉴 개발을 담당해야 할 에밀리는 예산이나 행정일에 허덕이며 부족한 인건비로 판매직원을 대신해 판매까지 도맡아서 했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일반 직원들이 레시피를 만들고 단기간에 허겁지겁 출시하는 일이 반복됐다. 새로운 시즌마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할 신메뉴들이 갈수록 정체성을 잃고 재미도 맛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마저도 마리아의 출산 휴가와 맞물려 에밀리의 마지막 메뉴는 일반 제과점에서 볼 수 있는 플랑, 에클레어, 피낭시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보석처럼 작고 반짝이는 세련된 케이크를 고집했던 에밀리의 정체성도 함께 사라졌다.        

에밀리의 초창기 메뉴들과 마지막 메뉴(우)

        파티시에라면 누구나 자기 이름을 내건 가게를 내고 싶은 꿈이 있을 것이다. 그 꿈을 반영하듯 많은 제과점이 문을 열었다 짧으면 몇 달 길면 몇 년 만에 사라지곤 한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제과점이 십 년 넘게 꿋꿋이 영업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 특별함이 어디 숨어있나 궁금하기도 하다. 좋은 상권에 위치해 있어서? 바게트 맛이 좋아서? 그것도 아니면 근처 경쟁 제과점이 문을 닫아서? 


        2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은 에밀리를 보며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이 그나마 덜 피곤하겠다 싶기도 하다. 문밖까지 배웅 나온 에밀리를 꼭 안아주었다. 에밀리의 얼굴은 많이 지쳐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표정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니 가족에게 돌아가 당분간 푹 쉴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과 같은 에밀리는 큰 모험이었고 실패로 남았지만 그만큼 많이 배웠을 것이다. 그 경험은 어디서 돈 주고도 못 살 큰 재산이겠지. 


        그나저나 에밀리야, 이제 사장 아니니까 친구 먹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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