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또방의 새로운 얼굴들
9월부로 생또방에 새로운 어프헝티들이 고용됐다. 이로써 막내에서 벗어나게 된 것인가!!!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던 지난 1년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도 드디어 멋진 케이크들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잔뜩 기대하는 나에게 니콜라스는 '셰프 어프헝티'라는 이상한 직함을 부여하며 거수경례까지 해주었다. 셰프 어프헝티라 함은 마치 '이등병 중 대장', '꼴등반의 일등', '초보 요리반의 백종원'처럼 말도 안 되는 반어법이라 어색하게 웃고 넘어갔지만 신입 어프헝티들을 다독이며 하루빨리 일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도 2년 차 어프헝티인 내게 주어진 과제 같아 어깨가 무거웠다. 사실 무엇보다 걱정이었던 건 내가 과연 불어로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작년부터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는 1년간 새벽마다 싸우며 정든 세월이 있어 내가 어색한 발음으로 말하거나 정관사 le와 la를 매번 바꿔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지만 새로운 신입들과는 어떨지 걱정이 앞섰다.
이 걱정에 이유가 있는 게 지난 7월 말에 1주일 동안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유학 온 환타라는 17살 여학생과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업장을 구해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고, 학교 입학허가서가 있어야 비자를 연장해 프랑스에 거주할 수 있으니 일을 구하는 게 너무나도 간절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모국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걸까? 저울에 표기된 숫자도 읽지 못하고 150그램과 100그램 중 무엇이 더 무게가 많이 나가는가? 같은 단순한 질문에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청소 중일 때면 내게 다가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기서 일할 수 있을지를 계속 물어보았지만 그녀가 없을 때면 그녀 이름을 두고 '오렌지'인지 '레몬'인지, '포도'인지 장난치던 아따나스와 니콜라스를 떠올리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라고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아프리카 특유의 악센트는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희망고문 탓에 본인도 힘들고 나도 언어장벽 때문에 힘들었던 1주일이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면접과 하루씩 일해보는 jour d'essai를 거쳐 4명의 새로운 어프헝티와 일하게 되었다. 제빵팀 1명과 제과팀 3명. 작년 제빵팀에서 일하던 어프헝티 중 2명은 정직원으로 고용되었고 나와 동갑내기 동기인 필립은 올해 제빵 상위 과정을 더 공부하게 되어 1명만 새로 들어오게 되었다. 제과팀에는 저스틴, 이멘, 윌리엄 3명의 어프헝티가 들어왔다. 작년보다 1명 더 티오가 늘어나 총 7명이 일해 다 모이면 주방이 다 북적북적하다. 그리고 주방 벽에 붙은 제과팀 휴무일 표.
제빵팀의 새로운 어프헝티 '유흐방'이다. 7월부터 일을 시작해서인지 그새 초보티를 많이 벗어났다. 24살. 부모님의 인공수정 시술로 태어난 세 쌍둥이 중의 막내. 제빵 주방으로 가면 가장 먼저 웃으며 반겨주는 귀염둥이다.
이멘은 뭐라 단정 짓기 어렵다. 2000년대 태어난 19살 소녀. 작년 CAP 시험에 탈락하고 1년간 재수를 하는 중이다. 알제리에서 프랑스 국적 어머니와 함께 3년 전 유학을 왔다. 본인 말로는 코로나 기간 동안 실습을 많이 하지 못하고 불어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시험에 통과 못한 거라고 하는데 실은 잦은 무단결석에 하루도 제시간에 출근하는 적이 없는 터라 셰프 아따나스에게 매일 혼나는 걸로 봐선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재학생 중 90퍼센트 이상은 합격한다는 CAP 자격시험에 탈락하는 그 10프로의 가능성을 보여줘서 나를 긴장케 한다. 나보다 불어도 훨씬 더 잘하는데, 이론 시험에 떨어지다니... 방학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이론시험 준비도 마음 잡고 퇴근 후에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이멘이 지난 2년 동안 일한 제과점은 거의 모든 제품을 냉동된 걸 녹여 팔기만 했던 곳이라 크렘 파티시에를 만들어 본 건 학교에서가 전부고, 에클레어도 우리 제과점에 와서야 처음 만들어봤다고 한다. 2년 경력이 있지만 서툰 게 많은 이멘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는 니콜라스의 잔소리가 너무 싫은 그녀는 쉬는 시간마다 가족에게 짜증이 가득한 아랍어로 음성메시지를 보낸다. 과연 1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을까?
어제 식재료 창고 정리를 하면서 이멘이 화를 내며 아따나스에게 다가갔다. 문제는 젤라틴 때문이었는데, 동물의 뼈나 피부에서 채취한 콜라겐으로 만든 젤라틴은 제과에서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재료이다. 대표적인 게 레몬 타르트의 레몬 커스터드 크림을 응고시킬 때 젤라틴이 들어간다. 웬만한 무스 크림이나 겉면을 반짝 반짝이게 만드는 글리사쥬에도 젤라틴이 필수로 들어간다. 채식주의자인 필립이 아침마다 어제 팔고 남은 케이크를 먹을 때마다 차마 그 케이크에는 젤라틴이 들어가며, 젤라틴은 결코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금단의 재료 젤라틴. (참고로 필립은 버터 대신 호박으로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는 열성 베제테리언이다.) 이멘은 더 나아가 이 젤라틴이 할랄(Halal) 제품이 아닌 것에 화가 난 것이었다. 이슬람교인 그녀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할랄 방식으로 처리된 식재료만 사용해야 하는데, 얼떨결에 본인이 먹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느냐는 것이다. 어제 아침에만 해도 돼지고기 잠봉으로 피자도 만들었던 그녀인데 유독 젤라틴에 할랄 표기가 되어있느냐를 묻는데 순간 당황했다. 찾아보니 진짜 할랄 젤라틴을 팔긴 하더라. 이걸 듣은 셰프 아따나스는 할랄도 마케팅의 일종이며 종교가 시장을 장악하려는 무시무시한 음모론을 펼치느라 청소시간이 또 왁자지껄 지나갔다. 과연 다음번 주문 때 그녀의 바람대로 할랄 젤라틴을 주문할 것인가...?
17살 윌리엄은 compagnons du devoir에 다닌다. compagnons은 중세시대 수공업자 길드에서 시작한 전통이 엄청 오래된 학교로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전통문화고등학교? 아니 오히려 청학동 예절학교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엄청 오래되고 자부심도 굉장한 곳이다. 학교 안에서 10대 청소년들이 정장을 입고 생활하고 전국 각지를 돌며 실습을 한다고 한다. 2년 동안 프랑스의 동쪽 끝 안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실습은 파리에서 한 윌리엄은 이미 CAP를 취득했다. 지금은 상위 과정인 mention을 공부 중인데, 학교에서 알선해서 우리 업장에서 실습하게 되었다. 공부는 또 툴루즈에서 4시간 떨어진 님이라는 도시에서 공부한단다. 나이보다 경력이나 디플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주방에서 윌리엄은 다른 신입 어프헝티들과는 다르게 허드렛일보다는 곧바로 생산일에 들어갔다. 주 3일은 생또방에서 나머지 2일은 다른 업장인 Saint-Sauveur에서 일하기로 했다. 상의부터 하의까지 모두 하얀 유니폼을 입은 그를 보며 제과계의 엘리트 과정을 밟는 사람은 이런 모습이구나 신기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굉장한 허당이다. 17살이 되며 출퇴근용 스쿠터를 마련했다는 그는 출근 첫날 스쿠터에 손을 데었고, 어제는 퇴근길에 스쿠터에서 떨어져 당분간 일을 못 나오게 됐다. 탈의실에는 그의 하얀 유니폼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저스틴. 툴루즈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코로나 역병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몇 개월 우체국 배달업무를 했었는데 이마저도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키도 크고 긍정적인 게 작년에 함께 일한 로렌을 떠올리게 한다. 신업 어프헝티들 중에 나이는 제일 많지만 제과 일은 가장 초보여서 그럴까 가장 정이 가는 후배이다.
이로써 올해 신입 어프헝티들과 1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내년 6월에는 시험도 함께 본다. 모두 다 합격해서 좋은 모습으로 생또방을 떠나면 좋겠다. 재수, 삼수는 노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