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고향 다녀오는 길

by 도은


용산행 KTX 안에서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다녀오는 길이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다. 길이 얼어붙어 용산행 기차는 10분 정도 지연되었다. 지연된 김에 가격은 저렴하지만 맛있는 편의점 커피와 호두과자를 사 먹는다. 방금 만든 호두과자 6알. 따끈하고 뭉근하다가 호두가 오독 씹히면 기분이 좋다. 역시 기차여행은 호두과자 먹는 맛이지. 거기에 따뜻한 커피를 한잔 호록 마시면 쓴 맛에 단 맛이 중화된다. 요즘은 이런 소소한 행복에 집중한다.


어제는 엄마, 남편과 함께 어린 시절 찍은 사진 앨범들을 연달아 몇 개나 펼쳐보았다. 나와 동생의 아기였던 시절부터 몇 개 없는 중,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보니 재미있었다. 엄마의 처녀시절 사진을 보고 “엄마, 이것 봐. 엄마 젊은 시절이 있었어. 정말 예쁘다.” 엄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의 젊고 예쁘고 좋은 시절이 속절없이 다 가버렸다. 아쉽다. 근데 한 번은 엄마가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엄마는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인생이 편하고 좋다.” 다행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이 좋다는 이야기니까.


앨범에는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일찍 세상을 뜬 친척언니와 우리 둘째 이모. 친척언니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30세에 아이 둘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나 대학원 때의 일이다. 급성 백혈병으로 아빠가 헌혈증을 모으러 백방으로 찾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척언니는 급하게 세상을 떠났다. 뭐가 그렇게 급했어 언니. 보고 싶다. 지금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아이들도 다 컸고 언니가 40살이 훌쩍 넘었을 텐데. 그리고 우리 둘째 이모. 유난히 나를 예뻐했었다. 둘째 이모는 이모들 사이에서 미모도 뛰어나고 성격은 유달리 착하고 여렸다. 그래서인지 일찍 세상을 떴다. 이 세상은 착하고 여린 사람에게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보고 싶은 우리 둘째 이모. 난 이모를 생각하면 이모가 불쌍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눈물이 난다. 이모가 하늘에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연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 창밖을 보니 겨울왕국이 따로 없다. 함박눈이 내리는 데다 기차의 빠른 속도와 맞물려 창밖의 풍경이 온통 하얗고 뿌옇게 보인다. 이번 겨울은 여느 때보다 따뜻해서 눈이 많이 안 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오산이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설국열차에 몸을 싣고 달리는 기분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 고속 열차를 탄 건 난생처음이라 처음 보는 풍경에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오묘하다.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서면 온통 까맣고 다시 나오면 온통 하얗다. 흑과 백이 반복된다. 우리네 인생처럼. 항상 흑일 수도 항상 백일수도 없고 무엇이 좋다 무엇이 나쁘다 할 수도 없다. 나중에 돌아보면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기도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도시에 다다를수록 하얀색이 적어지고 회색이 많아진다. 세상이 멈춘 듯하다가 갑자기 분주하게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아쉽다 조금 더 하얀 세상을 즐기고 싶었는데.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도시로 오니 뭔가 헛헛하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째깍대는 느낌이다. 다시 바쁘게 뭔갈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명절에 고향에 다녀오면 자주 느꼈던 기분이다. 짧은 휴가를 끝내고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이런 기분이 든다는 건 아무래도 나에게는 이보다 좀 더 긴 휴가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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