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면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된다. 영국에서 학교에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다. 학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 여름 방학을 시작하는 날에 아이는 일 년을 평가하는 성적표를 받는다. 3학년의 마지막 날 학교에 있는 아이를 픽업하러 나가면서 나는 다짐했다.
'혹시라도 성적이 실망스러워도 절대 티 내지 않기'.
평소 우리 부부는 성적이나 결과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초등학생은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시켜서 학교 가기 싫다는 우리 아이는 집에서 숙제만 하고 다른 공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이왕이면 아이가 잘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부든 무엇이든 말이다. 기분이 표정으로 곧잘 드러나는 나는 혹시라도 아이에게 나의 세속적인 마음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집에 도착해 아들과 함께 밀봉되어 있는 하얀 서류 봉투를 열었다. A4 용지 3-4 장의 성적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장에는 아들의 품행이나 태도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가 담겨 있었다. 뒤이어 빼곡히 과목별 평가와 앞으로의 학습 방향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엔 교장 선생님의 코멘트가 있었다. 초등학교 성적의 등급은 평균보다 뛰어남, 평균, 평균에 못 미침으로 나뉘어 있다. 다행히 아이의 성적은 좋았다. 그렇지만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성적표 맨 첫 장에 있었다. '엑셀런트 파트너라서 아이와 짝꿍을 하는 친구들은 학습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문장이었다. 아들이 수업시간에 친구들이 어려워하는 문제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친구들을 도울 수 있다니 참으로 감사하다.
아이가 성적표를 받아올 그즈음 나는 세상을 조금 넓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싼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라는 책과 영화 <가버나움> 때문이었다. 정혜윤 작가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매번 치열하게 메모했다. 사람의 말을 정성스러운 메모와 함께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라디오 PD로서 자신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늦더라도 누군가의 구겨지고 납작해진 삶을 살려내려고 했다.
영화 <가버나움>은 내 안에 갇혀 눈이 먼 나를 무척이나 부끄럽게 만든 영화였다. 나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삶 앞에서 눈감아버린 나를 반성하게 했다. 영화에는 자식을 돈벌이로 이용하고 방치하는 부모와 난민 어린이를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물로 또렷한 눈을 만들고 투명하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마음이 지칠 때면 쉽게 메말라버리고 사랑조차 잊어버리는 무르고 무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당장은 '사랑하기'밖에 없다. 나를 사랑하고 내 가족과 주변인들을 사랑하고 마주치게 되는 타인들을 사랑하고...
내 인생의 마지막 성적표에 기록될 유일한 과목이기도 한 '사랑하기'가 내가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아직은 내게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다. 약간의 용기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