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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Aug 27. 2021

목소리를 보여드릴게요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를 종종 시청한다. 예술가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영상과 큐레이터나 학예사의 전시 해설 영상을 주로 보았다. 어느 날 이 채널에 청각 장애인을 위한 수어 전시 해설 영상이 하나 소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서비스를 선보이다니 영국의 유명 갤러리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 김원영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파킨슨 증후군을 앓으며 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전까진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던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장애'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긴 투병생활을 보며, 그리고 내 나이 불혹을 넘기며, '장애'는 강도가 크든 작든 언젠가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단어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내가 신체적 장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는 아버지의 발병 전인 2006년이었다. 나는 런던의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칸도코(Candoco)라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는 무용단체의 공연 포스터를 우연히 보고 왠지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공연자들이 장애와 한계를 극복하고 어떻게 아름다움을 표현할지 무척 궁금했다. 당시 영국에는 칸도코 뿐만 아니라, 하트 앤 소울(Heart n Soul)과 그라이아이(Graeae)라는 수준 높은 장애인 예술단체가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장애인 예술과 문화정책을 주제로 논문을 제출해 대학원을 졸업했다. 논문을 쓰며 장애인 공연을 보고, 단체와 예술 행정가들을 만나며, 우리나라엔 언제쯤 장애인 예술이 꽃피울 수 있을까 막연히 상상해보곤 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조금씩 장애인 예술기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8년에 설립된 비영리 예술단체 '로사이드'는 다양한 워크숍과 프로그램, 전시회를 기획해왔다. 2015년에 공공기관인 장애인문화예술센터 '이음'이 개관했다. 주요 사업으로는 연구, 예술지원, 대관, 기획 사업 등이 있다. 그밖에 다양한 예술단체의 등장으로 장애인 예술창작활동에 활로가 열릴 수 있었다.

이음웹진 https://www.ieum.or.kr/user/webzine/list.do


최근 한국을 방문 중인 나는 얼마 전 지인과 함께 인상적인 전시회를 다녀왔다. 예술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났지만 예술가들의 독특한 시선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라는 이 전시회는 발달장애 작가 16인과 정신장애 작가 6인의 목소리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시키는 이들의 작품은 때로는 열정적이고 과감하게 때로는 조용하고 소박하게 표현되었다. 추상적이고 강렬한 색의 터치로 감정을 표현하거나, 본능적인 필치로 역동성을 보여준다. 옛날식 달력 뒷면에 샤프와 지우개만을 사용하여 정교한 로봇을 그리거나, 과거의 한순간이나 기억을 특정한 색으로 압축해서 표현하기도 했다. 경지에 이른 듯한 세밀한 작품에서는 작가의 어떤 집념이 느껴져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용뿐만 아니라 구성도 좋아서 영국의 갤러리에 소개되어도 좋을 전시였다. 아니나 다를까 '픽셀김'이라 불리는 김현우 작가는 작년에 이미 캐나다에서 전시 투어를 한 이력이 있다. 김동현 작가의 몇몇 작품은 프랑스의 한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전시에 참여한 스물두명은 예술가인데 장애를 가진 것 뿐이었다. 들의 예술은 활짝 피어나 빛을 내고 있었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전시회


 이 전시회를 주최한 서울시립미술관의 백지숙 관장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지 않고 사용자, 생산자, 매개자의 다양한 주체로 환대하며 미술관을 통해 모두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선보이겠다”


공공기관의 장이 요즘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씀을 하셨기에 무척 반가웠다. 사람들 사이에서 묻히기 쉬운 가장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미술관에서 계속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환대의 시작이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서 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한 보청기나 청력 치료제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과 그런 소통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내 삶을 실제로 개선했다. 그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과 가까운 곳에 줄곧 있었는데, 오랫동안 나에게 선택지로서 주어지지 않았다.  "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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