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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Sep 28. 2021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너희들과 이곳에서 만나고 싶어

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벤처 기부 펀드인 C Program의 해외특파원으로 활동 중이다. <해외특파원이 발견한 제3의 공간> 브런치 매거진에 해외 곳곳에서 사는 특파원분들과 함께 글을 발행해왔다. 다음 세대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연구하고 기획하는 C Program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고가 될만한 영국의 공간이나 프로젝트 등을 소개해왔다.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C Program에서 운영하는 스토리 스튜디오와 스토리 라이브러리에 갔다. 이곳은 서울 혜화역 2번 출구, 구 샘터사옥인 공공일호 건물에 위치한다. 입구만 다르고 사이좋은 친구처럼 나란히 붙어 있다. 둘 다 12-19세 청소년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열린 작업실이다. 아이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능동적인 창작을 장려하는 곳이다. 

스토리 스튜디오 건물 입구, 검은 문을 열고 올라갑니다

스토리 스튜디오는 누구나 자기 취향에 맞는 콘텐츠나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개발하며, 실행하는 공간이다. 이를 돕기 위해 폭넓은 창작과 만들기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도구와 재료들이 구비되어 있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를 위한 기본적인 재료뿐만 아니라 디지털 드로잉을 위한 태블릿도 아이들이 사용해볼 수 있다. 그렇게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든 창작물은 기록으로 남거나 이곳에 전시도 된다. 또한,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대해 대화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아이들은 진로에 관한 궁금증도 해소하고, 관심 분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시간을 갖는다.

창작 에너지로 가득찬 스토리 스튜디오

스토리 라이브러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공간이다. 독립출판물을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의 책, 글쓰기 관련 도서, 노트와 문구류 등을 구비해 놓고 책 만들기 여정을 돕는다. 아이들은 누군가의 책을 뒤적거리며, 노트를 끄적이며, 무심코 놓칠뻔한 자신의 생각을 알아채는 시간을 갖는다.  아늑한 조명과 차분한 분위기가 내면을 탐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조성해준다. 잡지 만드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그런지 아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잡지도 한쪽에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스토리 스튜디오 옆집, 스토리  라이브러리

스토리 스튜디오와 스토리 라이브러리에서 꼭 창작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무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친구들은 영화를 보고 책을 읽거나 그냥 아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뒹굴거려도 된다. 이곳은 모든 가능성이 열린 유년의 공간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창작하며 놀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배우고 깨우칠 기회를 가질 것 같다.  

이곳을 탐방한 후 그간 온라인으로만 뵙던 해외 특파원분들과의 반가운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청소년의 공간에 잠시 머물러서 그런 것인지 동창생 같은 특파원분들을 대면해서 그런 것인지 나의 유년기를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추억을 열심히 떠올려봤지만 딱히 인상적인 것은 없다. 신나는 일 없이 그냥 좀 무미건조했다.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학교에 가는 건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공부는 내 체질이 아니었다. 모두가 대학 입시를 향해 달려갔고, 나는 학교와 학원, 그리고 독서실을 전전했다. 그렇다고 내 성적이 좋았거나 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했거나 못했거나 상관없이 내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활을 했다. 입시에 대한 부담감이 무거운 추처럼 아이들의 마음속에 하나씩 들어있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던 기억이 난다. 노래방에서 춤추고 노래했던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즉석 떡볶이집을 가거나 막 생기기 시작한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는 것처럼 먹으러 가는 일이 소소한 이벤트였다. 모두 일탈로부터 한참 먼 이야기이다.

음... 생각해보니 일탈이 한번 있긴 있었다. 친구 집에 우르르 모여 청소년 관람불가였던 <원초적 본능> 비디오를 본 것. 사실 야하다고 해서 약간의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쫄리는 마음을 안고 보았는데, 우리는 생각보다 싱겁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그걸 보면 우리는 이성에 별 관심이 없었던 듯싶다. <원초적 본능>은 성에 대한 호기심을 부분적으로나마 해소시켜줬지만, 이후 그것에 더욱 시시함을 느끼게 하는 의외의 결과를 안겨 주었다. 유년기의 원초적 본능은 어쩌면 창작과 표현의 욕구에서 비롯되어 그런지도 모른다.

영화 원초적 본능

성인이 된 후 고교 동창생들과 만나 추억이라고 함께 회상한 것은 수업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해 쪽지를 돌린 것.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몇 분단을 거쳐서 도착한 쪽지에는 대부분 '매점 가자'는 글씨가 가는 길을 잠시 멈춘 지렁이처럼 게으르게 적혀있곤 했을 것이다. 매점은 지하 1층이고 우리 교실은 맨 꼭대기인 4층이었던지라 쉬는 시간에 그 많은 계단을 오르고 내리려면 미리 계획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린 매점에서 주문을 한다는 것은 전쟁을 피해 떠나는 막차에 오르려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모두에게 매우 치열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튀김이나 호빵 같은 음식들을 한 손에 쥐고 먹으면서 헉헉대면서 우리는 4층에 있는 교실까지 다시 뛰어 올라갔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맛이 달콤하긴 했다. 하지만 추억이라 말하기에도 뭐한 추억을 얘기하자니 어딘가 좀 아쉽다.


나의 밋밋한 십 대 시절에 스토리 스튜디오랑 스토리 라이브러리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우리도 각자 나름 취향과 관심사가 있던 소녀들이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덕질은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스토리 스튜디오는 자기의 관심사를 개발하고, 덕질하면서 어린 마음을 존중하고 알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잔소리나 간섭으로부터 멀어져 안전하게 마음껏 창작하고 실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나로 돌아가 스토리 스튜디오와 스토리 라이브러리 내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과거에서 다시 만나보는 상상을 잠시 해본다. 영화잡지 키노를 보고, 그랑블루 영화 엽서에 편지를 써주던 윤선이를 데려와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 나도 윤선이도 영화를 좋아했으니 스토리 스튜디오에서 영화계 종사자의 강연도 듣고, 그 기운을 받아 우리는 영화 한편쯤 제작하지 않았을까? 언제부터 힙합에 관심 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래퍼가 되고 싶었던 윤희를 이곳에 데려와도 좋겠다. 그 친구는 유리창으로 덩굴나무가 보이는 책상 한 곳을 차지했을 것 같다. 그곳에서 열심히 가사를 적고 랩을 완성해서 스토리 스튜디오의 다른 아이들에게 한번 들려주지 않았을까? 고3 때 갑자기 미대로 진로를 바꾸지 않게 선연이를 이곳으로 데려와 그림 그릴 기회를 미리 주고 싶다.

상상에서 나와 현실로 되돌아오니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한 우리 아들도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다. 외동인 아들이 이곳에서 또래 친구들을 새로 사귀어도 좋겠다. 이들과 함께 톱을 썰고,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경험을 통해 게임보다 창작의 기쁨에 다시 매료되지 않을까?

이곳에 초대된 우리들은 청소년에게 이렇게 공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부모님 외에 또 있다는 것, 그리고 준비된 재료와 자료 하나하나에서 보이는 세심한 사랑을 읽으면서 사춘기의 내일을 살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시하지 않은 추억 하나쯤 마음에 담아둘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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