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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21. 2021

아이들이 작가가 되는 공간

스토리 라이브러리를 소개합니다.

앞서 스토리 스튜디오를 소개했던 글에 이어 이번에는 스토리 라이브러리를 소개합니다. 스토리 스튜디오(이하 스스)가 아이들 작업실의 성격이 강했다면 스토리 라이브러리(이하 스라)는 좀 더 ‘이야기’라든가 ‘책’ 같은 단어에 밑줄이 그어진 곳, 즉 친구들이 작가가 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는 곳입니다. 12-19세의 청소년들만 이용 가능하며, 예약 후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은 앞서 소개했던 스토리 스튜디오와 동일합니다.


아래의 예쁜 일러스트를 보시면 감이 오실 거예요.

스토리 라이브러리 입구입니다. 이 사랑스러운 그림만으로도 환영의 기운이 물씬.

스스와 스라 모두 “이야기를 사랑하는 12-19세 청소년을 위한 열린 작업실”이라는 모토를 가지는 공간이고, 사선 위쪽의 초록 공간으로 그려진 스라는 “내 이야기가 책이 되는 공간”이라는 설명이, 아래쪽 파란 공간으로 표현된 스스는 “내 이야기로 마음껏 만들어보는 공간”이라는 문구가 붙어있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스라에는 서가와 책선반, 책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대가 돋보이고, 스스에선 재료바와 각종 도구들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친구들이 단연 눈에 띕니다. 민 매니저님의 설명에 따르면 왁자지껄한 스스와는 달리, 스라는 좀 더 고학년 친구들이 놀러 와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네요. 두 공간의 차이가 살짝 느껴지시나요. 스라는 조명도 좀 더 차분한 분위기입니다.


건물 소개는 지난 글에 했죠? 혜화역 2번 출구 앞에 놓인, 담쟁이가 예쁘게 덮인 건물. 제가 작년에 찍은 사진(왼쪽)과 민 매니저님께서 올해 찍으신 사진(오른쪽)을 가져왔는데요. 두 사진의 가장 큰 차이점 보이시죠. 교육자들을 위한 특별한 라이브러리였던 온 더 레코드 대신에 12세에서 19세 친구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나고 만드는 공간, 스토리 라이브러리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오픈한 지 두어 달 남짓 된, 따끈따끈한 공간입니다.

제가 2020년에 찍은 사진(왼쪽)과 2021년에 민매니저님이 찍으신 사진(오른쪽)

우선 공간 이용 팁과 규칙부터 살펴보실까요.

제가 다이어리에 끼워 온 종이라 꼬질꼬질 -_-

그림으로 표현된 스라 지도가 보이시죠? 기록 정거장, 덕질할 공간, 영상존, 이슈와 취향을 다룬 공간, 영감을 얻을 책들이 큐레이션 된 서가, 팝업북을 보고 직접 페이퍼를 컷팅해 볼 수 있는 작업대, 재료바를 이용해서 직접 내 첫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는 테이블, 다양한 잡지를 구비해 둔 곳까지 아주 그냥 이게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공간을 구상하고 채워 놓으신 분들이 어떻게 아이들이 작가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신 섬세함과 다정함에, 지나가던 나그네가 다 뭉클할 지경.


아래 사진은 스라의 규칙들인데요.

스라의 규칙들

공간 안에서는 모두 ‘작가’로 불린다는 점, 모든 기록은 원칙적으로 아카이빙의 대상이 되지만 그 여부는 개인의 결정에 맡긴다는 점, 밑줄과 메모와 흔적을 환영한다는 점, 프린트나 복사 같은 요청이나 질문, 제안을 언제든 환영한다는 점. 이렇게 다정하고 예쁜 규칙들이 있을까요. 마음껏 공간을 즐기는 것이 규칙인 곳이네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스라 구경을 해 보실까요. 아이들이 작가가 될 시간을 만드는 공간은 어떤 모습인지 한 번 둘러보시죠. 제가 구석구석 손가는 대로 찍어온 사진들을 그냥 하나씩 보여드릴게요.


이건 ‘편집자’라고 불리는 운영자 테이블입니다. 저번 글에서 밝혔듯이 작업실인 스스에 상주하는 어른은 [매니저], 이야기가 책이 되는 공간인 스라에 상주하는 어른은 [편집자]로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공간에서 특별히 [작가]로 불린다죠. 공간에 따라 이름들을 고민하신 마음이 엿보입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듯, 이곳에 들른 친구들은 불리는 이름에서부터 조금은 쑥스럽지만 따뜻한 격려를 받게 되겠네요. :-)

“Let‘s write! 이제는 작가가 될 시간.” 이라는 문구가 돋보입니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작가가 되어 직접 자신의 기획과 이야기로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료들이 한가득 들어있는데요.

취향, 존중, 성장, 관계, 비밀 등 나만의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8가지 주제를 책, 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포맷으로 만나볼 수 있다고 해요.  


우선은 아이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데 영감을 줄 수 있도록 각 주제별로 세심하게 큐레이션 해 놓은 서가가 눈에 띄었습니다. 스라에서는 책으로 영감을 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책을 정말이지 마음껏 자유롭게 읽도록 하는 것도 좀 놀라운 부분이었는데요. 찢지만 않으면 되고, 책에 줄을 긋거나 메모를 남기는 등의 흔적은 오히려 환영한다고 해요. 친구 작가들이 영감을 얻거나 그 흔적에 자신의 흔적으로 답하도록 장려하는 환경인 것이죠. 그래서 서가에는 밑줄을 그을 수 있는 펜이며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접착식 메모지, 하이라이터 등이 함께 구비되어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근사하죠?

왼쪽은 취향, 성장, 관계 등 주제별로 세심하게 큐레이션 해두신 책들, 오른쪽은 메모와 흔적을 조용히 장려하는 환경

아래 사진은 헤드폰을 끼고 영상 콘텐츠를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책뿐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도 주제별 큐레이션의 대상이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죠. 스스는 어떤 소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야말로 그에 관한 다양한 장르와 포맷의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여기에서는 친구와 옹기종기 모여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면서 화면 안의 이야기에 폭 빠졌다 나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그 앞으로는 작은 테이블 위에 각종 스탬프와 테이프가 한가득.  

아늑하도다

한쪽에 마련된, 친구들의 영화 추천 게시판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요. 장르 추천이라는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친구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예쁜 맵을 만드는 중이더군요. 살펴보니 ‘인생을 되돌아보는 장르,’ ‘말이 필요 없는 망작,’ ‘꿈에 나올 것 같았던 영화,’ ‘꿈인지 현실인지 헛갈리는 영화,’ 너무 좋아서 벽 치다가 무너져서 옆집 만날 장르’ 등등 너무나 새로운 장르의 영화 추천에 한참을 으허허.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우리집 벽 철거용 영화로 추천되어 있었습니다

스라에는 에세이 형식의 자기 이야기를 쓰는 친구들이 많다고 합니다. 뭔가를 써보고 싶게 만드는, 무료로 제공되는 공책이며 빈 페이지의 책들도 가득해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듯한 물고기의 표정이 일품

앞서 스스에서 보았던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작은 책이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스라에서는 자기 이야기와 기록이 중심이라면 스스의 책들은 픽션, 크리에이티브 스토리 중심이라고.

바로 이 책들. 스토리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스라에서는 내가 가진 이야기의 ‘내용’ 자체를 마음껏 펼치고 가꿀 수도 있지만 실제로 다양한 ‘형태’와 물성을 가진, 물건으로서의 책을 보면서 나만의 책을 직접 기획하고 만드는 경험을 해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서가도 이야기의 소재를 찾는 ‘주제 서가’와 책을 직접 쓰고 만드는 방법을 탐색할 수 있게 돕는 ‘동사 서가’가 따로 있습니다. 위에서 보신 서가가 주제 서가였고, 아래 사진은 동사 서가의 책 선반. <책 만드는 법>, <웰컴 투 독립출판>, <기록의 쓸모>라는 이름으로 큐레이션 된 책들이 보이시죠?

저도 참 보고싶은 책들이 많습니다만

직접적으로 ‘쓰는 행위’를 돕는 책들도 많아요. 단어에 관한 책들, 표현에 관한 책들, 어감과 클리셰에 관한 책들, 아이들이 이야기들 만들 때 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디테일 사전 같은 것들은 저 같은 기성작가(라고 쓰려니 격렬히 남사스럽다)들에게도 너무 흥미롭고 부러운 자료들입니다.

세상에 이런 책들도 다 모아놓으셨다고요?

이제 슬슬 ‘작업물’로서의 책을 만들 수 있는 공간 쪽으로 들어와 보실까요.

여기는 예쁜  팝업북이 전시된 선반 아래에서 직접 나만의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작업대고요.

그냥 요대로 잘라서 우리 집에 가져오고 싶습니다

다양한 두께의 종이, 다양한 사이즈의 노트, 다양한 색깔과 굵기의 펜 등등 한 번 끄적거려 보고 싶은 재료와 도구들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물성을 가진 책들을 직접 보면서 나만의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다정히 권하는 공간입니다. 아래의 재료바를 보시죠. 12-19세만 들어올 수 있다니 이 아줌마는 넘나 슬프고 부럽고…

이 모든 재료들을 마음껏 사용해 볼 수 있어요. 웰컴 투 헤븐!

그리고 그렇게 직접 만든 책들을 좀 보실까요. 아이들은 독립출판에 관심이 많고, 기존의 정형화된 책 모양을 파괴하는 걸 좋아한다고 하네요.

담뱃갑처럼 생긴 책도 있고, 미니 사이즈의 귀여운 책들이 많네요

이 날 제 눈을 사로잡은 책은 지유라는 친구가 만든 꽃 도감. 제 손가락이 같이 찍혔으니 얼마나 귀여운 사이즈의 책인지 아시겠죠?

저는 할미꽃의 큐트함에 일단 한 번 쓰러지고, 철쭉과 배롱나무의 매력에 퐁당.

으어어어어어 소장하고 싶다

아날로그 재료와 도구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며 장비, 프로그램들도 많이 구비되어 있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아이들이 아이패드로 작업을 할 때 필요한 앱들을 모아놓은 화면이에요. 영감을 수집하는 앱(카메라, 한 줄 쓰기, 서재), 기록하는 앱(굿노트, 노션), 써보고 그려보는 앱(스케치북, 프로크리에이트),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 탐색하는 앱(구글, 네이버, 유튜브 등) 등. 너무 다정하고 꼼꼼하게 잘 정리하고 구비해 두셨죠? 이런 기기와 앱들을 사용해 보는 것, 탐색해 보는 것만으로 디지털 세대 아이들은 작업에 필요한 에너지와 자신감이 슥슥 충전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아이패드가 내 아이패드였어야 해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자료는, 실제로 작가나 피디,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 등으로 활동하는 어른들의 작업 노트를 기증받아 전시해 둔 것이었어요. 아이들이 뒤적거려 보면서 ‘아- 실제 작가가 직업인 분들은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시는구나-’ 하고 눈과 마음을 반짝이겠죠.   

저와 친분이 있는 모 피디님의 손글씨가 가득 담긴 작업노트 발견.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스토킹 하지 말라는 다정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_-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한껏 밝고 왁자지껄한 스스와는 달리, 스라는 조금 가라앉은 차분한 분위기의 공간입니다. 테이블마다 간접 조명을 놓아주시기도 했고 이렇게 스라러들이 직접 조명을 들고 탐색해 보는 것도 가능한데, 재밌어들 한다고 하네요.

아이들이 직접 만든 인터뷰들이 전시된 곳. 구성에서 완성작에 이르는 결과물 과정 전시를, 조명을 들고 탐색해 보시는 모 특파원님의 손

스스와 스라에는 가장 특별한 규칙이 있는데, 바로 어른들의 출입이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없는 또래들만의 공간에서 아이들의 날개는 가장 힘차게 파닥거릴 수 있으니까요. 다만 공간을 고민하고 운영하시는 분들에 한해 극도로 제한된 인원만 출입 가능한데, 아래 포스터는 이 어른들만 이곳에 들어온다는 약속입니다.  

놀라지 말아요. 뭐든 물어보세요. 해치지 않아요.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붙인 스스 규칙에도 ‘어른 출입 금지’가 들어가 있네요 :)

음식 반입 금지 그림을 보고 침을 흘리는 중입니다


이렇게 2회에 걸쳐서 스토리 스튜디오와 스토리 라이브러리를 둘러봤습니다. 어떠셨어요. 정말 귀하고 매력적인 공간이죠. 이런 공간들이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어 퍼져 나갔으면, 그래서 납작하게 짓눌려 있는 12-19세 청소년들에게 꿀(혹은 꿈) 같은 시간과 공간을 선물했으면, 아이들이 그 안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가꾸고 다듬어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 책을 내놓는다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조금 써볼까 하다가 그냥 <나니아 연대기>를 쓴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인 C.S. 루이스의 문장 하나를 놓고 갑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Lewis


자, 마지막으로 스라를 이용해 보고 싶은 친구들이라면 주목!



스토리 스튜디오 소개글이 다시 보고 싶으시다면


https://brunch.co.kr/@jinmin111/199



그리고 추석을 맞아 슬쩍 끼워보는, 제가 만든 이야기. 지금 보니 영 엉망이고 부끄럽네요. 그래도 쓰면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의 즐거움에 폭 빠져있었던 이야기라는 설명을 수줍게 덧붙여 봅니다.

모두들 편안하고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https://brunch.co.kr/@jinmin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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