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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Nov 16. 2021

단팥빵의 계절

동네에 있는 일본 슈퍼마켓에서 단팥빵 세 개를 샀다. 장 볼 때가 지나 냉장고가 텅 비었길래 아이 간식으로 산 것이다. 실은 내가 먹고 싶기도 했다.  온몸을 관통하는 축축한 겨울 느낌이 며칠 이어져서였을까. 영국의 스산한 공기 때문에 그리도 단 음식이 당겼나 보다. 그래서 초콜릿에 손이 가는 날도 많았던 것이다. 단팥빵은 밀가루가 덜 들어가 한국의 단팥빵만큼 실하지 않고 먹고 나니 조금 허전했다. 그래도 맛이 비슷하니 다행인건가.


추위는 몸만 엄습해오는 것이 아니다. 바람만이 휘젓고 다니는 텅 빈 마음을 만들기도 한다. 이럴 땐 먹는 것 말고도 따뜻하게 덮을 것이 필요하다. 창가로 보이는 회색 하늘의 옅은 빛을 받으며 묵묵히 선반 위를 지키는 한국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여름 한국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선물로 준 책들도 있다. 책을 만지작거리며 단어들로 꽉 차 있는 듬직한 무게를 느껴본다. 그 여름 한국에서의 추억이 방금 꺼낸 군고구마처럼 따뜻한 김을 모락모락 피어냈다.   


지난 8월, 2년 만에 4주 일정으로 한국에 다녀왔다. 백신 미접종자인 아들이 함께 오면 2주 동안 격리를 해야 했기에 격리 면제 자격을 부여받고 나 혼자 왔다. 그런데도 4주는 너무 짧았다. 매주 치과 진료를 보고, 병원 검진을 받고, 운전면허 갱신과 자잘한 볼일들을 보았다. 이런저런 일로 바쁠 것 같고, 코로나 시국이어서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온다는 말을 미리 하지 않았다. 해외 입국자 PCR 검사를 두 번 모두 마치고,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친구들에게 연락해 약속을 정했다.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혼자인 엄마를 두고 너무 돌아다니는 것 같아 모든 친구를 만나는 것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도 아버지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본 친구들에게 왔다는 말도 안 하고 그냥 영국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결국 출국일 이틀 전에 두 명의 친구를 극적으로(그들 입장에선 일방적인 통보) 잠시 만났다. 의사와 교수이고 나보다 언니인 그들은 내가 만난 이들 중 가장 바쁜 사람들이었다. 불시에 그리고 뒤늦은 연락에 면목이 없어서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내게 뭐라 하지 않고 순순히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었다. 언제나처럼 나를 한없이 받아주었다. 늦게까지 진료가 있어 저녁도 못 먹은 의사 언니는 밥 먹으러 가지도 않고 한 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함께의 시간을 연장하고 싶어 한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교육연극을 가르치는 지인은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어린이 희곡집을 챙겨주었다. 영어 원문이 함께 있는 그 희곡집은 내가 요즘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 교재로 사용 중이다. 그 책을 손에 쥘 때마다 보드라운 털장갑을 낀 것 같다.


이번 방문 때는 예전과 다르게 친구들과 사진도 남겼다. 20대 때는 그렇게 찍어대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진 찍히기를 멀리하던 나였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한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저금해둔 행복한 날들을 영국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 꺼내 쓰고 싶었다. 오랜만이라 어색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미처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시간들은 그저 아쉽기만 하다.


밤이 길어지는 요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그 시간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촘촘히 퍼지는 보약처럼 느껴진다. 친구와 가족과 소박하게 시간을 나눠가진 것뿐이었다. 소설 <밝은 밤>에서 삼천이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 새비에게 '함께하는 시간이 아깝고 아쉽다'고 했던 것이 이해되었다.

낙엽이 다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로수를 지나치게 된다면, 나는 햇볕에 데워진 돌멩이를 집어 드는 대신 얼굴이 묻은 사진들을 보며 마음의 구들장을 데울 것이다. 구름처럼 뭉뭉게 일어나 스러지는 달콤한 단팥 알들을 잠시 입안에 가둬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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