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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Feb 28. 2021

친구에게

며칠 전에 책을 읽다가 눈물이 왈칵 나더라. 네 생각이 나서 그랬나 봐.

김연수라는 작가가 그러더라고,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혼자서 하는 일은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나는 너와의 추억이 너무 많잖아.

널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 투박하고 숱이 많은 앞머리를 일자로 내리고 빨간색 더플코트를 입은 네 모습. 입시로 정신없고 긴장되던 그 와중에, 수많은 아이들 중에, 네가 보였지. 촌스러우면서 튄다고 생각했었거든. 나중에 너도 그 시험에 합격을 해서 우리는 대학 강의실에서 다시 만났지. 나는 그때 생각했어. 너랑은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고. 너는 나랑은 왠지 다른 것 같다고.

그런데 네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지. 내가 너희 집에 놀러도 가고 그러면서 너라는 아이에 대해 제대로 보기 시작한거야.

우리는 다르긴 달랐어. 나는 내성적인 성격에 사람을 가리는 편이잖아. 너는 활발하고 모두와 두루 잘 어울렸지. 그래서 너는  나의 고등학교 절친들이랑도 처음 보고도 금방 친해졌잖아. 한때 내가 너에게 부녀회장이라고 불렀던 거 기억나지? 게다가 너는 내 친구들 중에 가장 독특한 아이였어. 너 같은 캐릭터는 정말 흔치 않지. 너는 엉뚱하고 웃기는 행동들을 많이 했거든. 한 번은 네가 코가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었잖아. 내가 놀라서 병원에 찾아갔는데 너는 흉측하게 부어오른 코를 셀카로 찍고 킥킥거렸잖아.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너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유쾌함을 잃지 않더라. 그런 너의 여유 있는 성격 때문에 네가 더 좋아졌던 거 알아? 뿐만 아니라, 너는 내가 삐딱하게 생각하는 것도 더 넓게 받아들이는 넉넉한 성품도 지녔지. 그래서 우리가 나눈 시간을 기록한 사진첩이 두터워질수록 너는 내게 더욱 든든한 사람이 되었어. 나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너에게 기대어 쉬곤 했지. 언젠가 내가 너에게 '너는 선물 같은 친구'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 내 입에서 선물이라고 말하게 만든 사람 네가 처음이었다. 정말로..

너는 우리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도 함께 했었잖아. 친정보다 네가 더 가까이에 살아서 네가 운전해서 우리를 산부인과에 데려다주었지. 아기가 나올 때도 네가 병실에 함께 있어서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몰라. 정작 너는 내 출산과정을 전부 사진으로 담느라고 정신이 없었지만 말이야. 너는 내게 그렇게 가족과도 같은 친구였어. 내가 너희 언니랑 부모님이랑 함께 식사를 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지. 2019년 여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네 언니랑 아버지랑 같이 식사를 했잖아. 그리고 너희 집에 와서 이틀을 묵었는데 네 남편도 우리 과 동기여서 우리는 서로가 너무 편했지. 생각해보니 그해 10월에 우리 아빠 발인 날이 너와의 마지막 추억이네. 너랑 언니가 장례 미사에 와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네. 장례식이 끝나고 이주 후에 나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잖아. 적적해하실 우리 엄마가 염려돼서 네가 가끔 안부 전화를 걸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배려 깊고 싹싹해서 우리 엄마도 그런 너를 참 예뻐했지.

  

요 며칠 나는 잠을 좀 설쳤어. 조금 불안한 꿈들을 꾸었었거든. 기분이 너무 가라앉았지. 네가 너무 걱정이 됐어.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인생을 알 수 없다'는 것만 확실히 알았지. 그러다가 그제 우연히 <미나리>라는 영화를 봤어.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거든. 나름 나도 노력한 거였어. <미나리>는 고통이 있지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영화였어. 영화의 감흥 때문에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날은 모처럼 꿈도 안 꾸고 깊이 잠이 들었지. 왜 하필 그날 나는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까? 이상하더라.. 지금 생각해보니 그 영화는 네가 내게 남겨주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 같았어. 내가 맨날 너에게 징징대니깐 그런 건가 싶기도 해.


오늘 네 언니가 왓츠앱으로 사진을 보내줬어. 한 달 전쯤 한국에 있는 너별것도 아닌 걸로 대화를 나눴던 건 카톡이었지. 해외에 사니깐 이런 메신저들이 얼마나 유용지 없으면 어쩔뻔했을까 싶어. 그런데 오늘은 이런 편리함의 혜택을 누리고 싶지 않았어. 예쁜 꽃들로 둘러싸인 너의 사진을 보니깐 네가 떠났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나서. 나는 네가 누워있는 한국에 가볼 수 없으니깐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거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네가 꼭 깨어날 줄 알았거든. 얼마 전 네 생일날에는 네가 말도 하게 될 줄 알았거든. 너는 너무 젊고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니깐. 내 기도가 부족했나 싶어 너무 미안하다. 아직도 네 목소리와 해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데. 네가 떠난 날은 봄날처럼 화창하고 밤하늘에 보름달은 너무나 크고 밝구나. 이제 나는 너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네. 네가 왜 이렇게 급하게 가게 됐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어.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신이 너를 벌써 데려간 이유를 찾고 싶었거든. 그런데 정말 모르겠어. 그래도 분명한 건 다음에도 너랑 친구 하고 싶다는 거야.


다음에도 꼭 내 친구가 되어줘.

내 삶을 빛나게 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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