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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Aug 28. 2020

 아이에게는 눈이 하나 더 있다

한국에 태풍이 왔다고 하던데, 요즈음 런던에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창밖을 헤집고 다니는 귓가에 낯익은 바람 소리는 어느덧 나를 제주도 바닷가의 추억으로 데려다주었다.

정말로 지금 내가 제주도 바다 앞의 어느 공간 안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잠시 설레는 상상을 했다.     

섬나라여서 그런지 영국에서는 바람의 위력이 강력할 때가 있다. 그래서 집 앞 길가에 있던 나무가 쓰러지는 일도 종종 있다. 한 번은 우리 집과 이웃집의 경계를 그어 놓는 나무 울타리가 부서지기도 했다.

이번에는 우리 집 정원에 있던 부들레아가 강풍에 장렬히 전사했다. (얼마 전 귀초라고 했던 아이인데 뿌리 채 뽑혀 자연스럽게 제거되었다.)

영국의 가을과 겨울은 우기라서 이렇게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요즘 이어지는 날씨를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은 창밖으로 얇은 패딩을 입고 걸어가는 사람도 보았다. 곧 여름과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아쉽다. 매일같이 태양이 이글거리던 여름날, 정원에서 처음으로 튜브 수영장을 개장했었다. 그때 아이는 너무 좋아 뭔가 횡재했다는 듯 연신 "대박! 이만 원!"을 외쳤다. 우리 엄마가 남대문에서 예쁘고 저렴한 옷을 득템 했을 때 했을법한 말인데, 이런 표현을 아이가 어디서 배웠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해석해보면 '기분이 매우 좋다'는 최상급의 표현이다. 정원에서 물놀이하던 아이의 즐거웠던 순간도 이제는 여름날 추억으로 자리할 것이다.     

선풍기 쓸 일이 별로 없는 영국에서 밤에 잘 때도 선풍기를 틀어야 했던 뜨거웠던 그날들이 벌써부터 그립다.

 

비가 오다가, 해가 잠시 나오고, 바람이 세게 불어도 우리의 일상은 지속되어야 하기에, 아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산책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각인 7시 40분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곧 비가 올 것 같은 구름 가득한 하늘 때문에 우산도 하나 챙겨 들었다. 역시 예상대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빨리 공원에 가고 싶어 길을 재촉하는 우리 마음과는 달리, 바람의 압력은 우리가 걷는 속도를 늦추게 만들었다. 집에서 공원 입구까지는 괜찮았는데 공원에 들어서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오분쯤 걷고 나니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그러다가 공원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는 비가 그쳤다. 한 바퀴를 다 돌고 우리가 출발한 지점쯤에 도달하자 또다시 비가 내렸다. 나는 급하게 우산을 폈는데, 우산이 바람에 그만 확 뒤집혀버렸다. 아들은 그게 재미있는지 내 옆에서 한동안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우산을 겨우 원상 복시킨 후 접어들었다. 우리 둘 입고 있던 방수 재킷의 후드로 머리를 덮 비를 피하기로 했다. 다행히 금세 비가 그쳤다.


아들과 나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굴하지 않고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공원 길을 계속 걸었다.

잔디 위를 잠깐 밟아보던 아들이 갑자기 나무 밑에 멈춰 섰다. 그러면서 내게 '도토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서 있던 자리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이제 갓 태어난 것 같은 초록색의 귀여운 도토리가 잔디 위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었다. 아이는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도토리를 집에 가져가고 싶다며 동심이 가득한 눈으로 내게 허락을 구했다. 나는 왜 도토리를 가져가고 싶냐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도토리가 너무 예뻐서 간직하고 싶단다. 다람쥐가 먹을 충분한 양의 도토리가 우리가 있던 주변에 나뒹굴었다. 가자마자 도토리와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아이에게 도토리 하나를 허락했다. 아이는 그제야 도토리 하나를 조심히 집어 들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는 공원을 마저 걸으면서, 보석같이 소중한 도토리를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주머니 언저리를 계속 만지작댔다.


아이가 아니었으면 매일같이 산책하러 다니는 동네 공원에 도토리가 떨어져 있다는 걸 나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내가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항상 이렇게 새롭게 발견하게 해 준다. 똑같이 걷는데도 나는 빨리 달리는 자동차에 탄 것처럼 차창으로 휙휙 스쳐 지나가듯이 풍경을 본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만의 걷는 속도로 천천히 음미하며 세상을 바라본다. 그 풍경이 아무리 집 앞 공원의 익숙한 모습이라도 아이에게는 매일 새롭다.  

몇 주 전 주말, 아침을 먹기 위해 다이닝룸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았을 때, 정원 담벼락에 다람쥐가 온 걸 알려준 것도 아이였다.  


또 한 번은 교외로 하이킹을 갔다가 지도를 보는데, 새끼손톱만한 달팽이가 지도 위에 있는 것 아이가 발견했다. 마치 원래 있던 지도의 한 부분처럼 보이는 그 작은 달팽이를 나와 남편은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아이의 눈에는 마치 돋보기가 달려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아이에게 농담으로 눈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이 덕분에 나도 세상을 이렇게 조금 달리 바라보게 된다. 자기만의 시야가 확고해지고 일상에 무뎌져서, 어른들은 때로 눈이 두 개여도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 아이도 언젠가 세 개였던 눈이 두 개로, 그리고 하나로 변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모인 우리는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던 아이의 어린 시절을 찬란했던 지난여름의 태양처럼 그리워할 것이다.

아이가 두 눈이 사이좋게 세상을 바라보는, 호기심이 가득한 그 시선을 오랫동안 계속 간직해주면 좋겠다.        






                 



ⓒ새벽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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