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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Aug 07. 2020

잡초가 아니라 '귀초'로 밝혀지다

대부분의 영국 주택이 집을 중심으로 앞 뒤로 정원을 두고 있듯이, 우리 집에도 작은 정원이 있다.  

집 입구부터 현관까지의 공간을 차지하는 앞 정원과 부엌이나 다이닝룸과 연결되어 있는 뒷 정원을 가지고 있다.

인건비가 비싸기도 하고, 가드닝을 사랑하는 국민성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인이 정원을 직접 관리한다. 여든을 바라보는 시아버지도 우리 집의 서너 배가 되는 정원을 직접 돌보신다. 우리 집 정원사는 남편인데, 재택근무임에도 오히려 더 바빠져 그간 정원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요즘같이 해도 쨍쨍하고, 비도 간간히 오는 날씨에는 정원이 금세 잡초로 무성해지기 쉽다. 남자들이 정기적으로 이발을 해줘야 하듯이 정원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집안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듯이 정원 일도 꼼꼼히 하자면 일이 많다. 그래서 작은 정원이라도 의외로 손이 많이 간다. 원래 작은 공간이 어질러지면 더 지저분해 보이는 법. 남편이 한가해지길 기다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우리 집 정원을 구조하기 위해 내가 나섰다. 나는 간단히 눈에 띄는 잡초만 뽑아보기로 마음먹고 정원일을 시작했다.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하는데 벌써부터 풀냄새가 내 코를 무장해제시킨다. 푸릇푸릇한 잔디가 싱그러움과 자연의 소박함을 그대로 전달해줘 내 마음이 평온해진다. 일하는 동안 심심하지 말라고 귀뚜라미과의 이름 모를 곤충이 배경음악도 깔아준다. 마치 재즈음악에서 드럼의 심벌즈를 느리게 살짝 건드리는 것 같은 진동소리를 낸다.


잡초는 잔디가 있는 푹신한 땅과 단단한 시멘트가 덮인 땅 모두 가리지 않고,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냈다. 우선, 나는 잔디 위 곳곳에 불쑥 솟아있는 민들레과의 노란 꽃들을 뽑기로 했다. 민들레가 잡초였다니.. 남편이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그 꽃들을 꺾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막상 잡초를 뽑자니, 자신들이 처할 운명도 모르고 노란색의 밝고 낙천적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정원이 정글로 변하면 더 곤란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제거했다.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이들은 그로부터 이틀 후 잔디 위로 또다시 노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잔디와 분리된 돌 위로도 민들레를 비롯한 이름 모를 잡초들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시멘트의 갈라진 틈을 뚫고 나오는 잡초들은 잔디 위의 잡초들보다 제거하기가 더 어려웠다. 뿌리가 더 굵고 단단해서, 운동회 때 줄다리기하듯이 줄기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뽑아야 되는 경우가 많다. 돌 밑에서 단단히 버팅기고 있는 뿌리는 완전히 다 제거하기 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그냥 놔둔다. 덥지도 않은 날인데 정원일을 조금 했다고 벌써 몸에서 살짝 땀이 났다.  


하지만 내게는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할 왕 잡초가 있었다. 나만큼 키가 크고 산발머리를 한 그것이 다이닝룸 창문 앞 모서리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우 꼴베기싫어..)

우리집 한구탱이에서 신나게 자라난 잡초


이 아이는 바람이 물어다 준 작은 씨앗의 거대한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해 주었다. 잡초라 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범상치 않아 이 꽃의 이름을 남편에게 한번 물어보았다. 역시 웬만한 꽃과 새 이름을 다 아는 남편은 그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 거인은 '부들레아(buddleia)'라는 꽃이었다. 남편과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가 우리는 부들레아를 한동안 그냥 놔두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 꽃은 우리 집으로 오는 나비와 벌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꽃이었기 때문이다.

나비와 벌은 자신들의 아지트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부들레아로 들락날락거렸다. 게다가 여름 라일락으로 불린다는 부들레아는 향기도 좋다.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책임지고 있어 영국 왕립 지리학회가 지구 상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체라고 한 곤충인 벌. 개체 수의 감소가 우려되고 있는 벌이 좋아하는 꽃.

부들레아는 잡초가 아니라 귀초였다. 속썩이고 대책 없어 보이던 자식이 나중에 대성해 부모에게 제일 효도하는 것처럼, 알고 보니 부들레아의 존재도 그런 것이었다. 지금 당장 우리 집의 미관을 해쳐놓는 말썽꾸러기이긴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곤충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 지구를 살리는 일에 일조하고 있었다.

사실 잡초 중에는 이로운 것들이 많다. 민들레도 그렇고 부들레아도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하니,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모두 다 저마다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오늘도 각자의 역할을 하며 열심히 달리고 있을 미물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될 거란 걸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잡초 같아 보여도 알고 보면 귀초일테니까.                    

                      

ⓒ 새벽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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