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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Jun 09. 2019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85세 영국 추상화가 Frank Bowling

비가 주룩주룩 오는 전시회에 가기에 좋은 날씨였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내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 전시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 눈에 띄었던 전시 포스터가 생각났다. Tate Britain에서 하는 85세 흑인 할아버지 추상화가 Frank Bowling의 전시회였다.   

일단 가디언지를 포함한 리뷰를 살펴보니 굉장히 호평일색이었다. 가디언지에서 별 다섯 개 만점을 주다니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내 머릿속에 늘 구름처럼 떠다니는 "나이음"과 "이방인"의 카테고리에도 딱 들어맞았다. 예전에 내가 올린 <할머니는 살아있다> 글에 등장한 영국 조각가 Phyllida Barlow는 75세, Frank Bowling은 85세, 최근 Tate St Ives에 전시했던 Anna Boghiguian은 73세로 요즘 영국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예술가들의 전시가 대세인 것 같다. 영국에서 전시회나 공연을 보러 가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인 관람객이 눈에 띄게 많은데 물론 아니겠지만 이런 관람객층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있는 나는, 나이 들어도 건재한 예술가들이나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한 유명한 작가들을 보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위안을 삼고 나이가 많아도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자 한다. 그러면 나도 늙어간다는 것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1934년생인 Frank Bowling은 영국령이었던 남미의 가이아나 출생으로 젊은 시절 영국으로 건너와 영국 최고의 술학교인 Royal College of Art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와 동기생이 되어 미술 공부를 한다. 학교에서 인정받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에 들어서며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다. 초기에는 자신의 나라인 가이아나에 대한 추억과 자신 주변과 관련된 것들을 표현해 구체적인 대상이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과 함께 등장한다.



Bowling이 태어난 가이아나의 동네 이름인 <Bartica>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 문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잠시 멈쳐서야했다.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화가의 가슴 한편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아니면, 전시를 보러 오기 바로 직전까지 읽은 이경미 영화감독의 책 < 잘 돼가? 무엇이든>에서 이경미 감독 엄마가 딸에게 보냈던 문자 내용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선 은연중에 우리 엄마가 그리워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제 영국에 돌아온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고 어느 정도 다시 적응하고 잘 지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내가 노력한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난 외국인이고 여기는 내 나라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 나에게 따뜻하고 정겨운 존재인 나의 가족은 한국에 있다는 것.

그래도 내가 처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여야 하니깐 다시 일어나 담담하게 다른 작품들을 보러 자리를 옮겼다.      

 

Bowling은 여러 가지 도구와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에 더욱 실험적인 시도를 하게 되는데 어떤 작품은 2M 높이에서 물감을 떨어뜨려서 작품을 완성시키기도 하고, 어떤 작품들은 아크릴 젤을 사용하여 장난감이나 플라스틱을 캔버스에 고정시켜 여러 겹으로 채색하여 캔버스 표면에 입체감을 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실험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작품을 보면 추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 JW 터너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고, 때로는 뜨거운 태양처럼 강렬하고 열정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전시장 구를 나서기 전에 보았던 마지막에 전시되었던 작품 중 하나를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웅대함을 느꼈고 그 작품이 내게는 전시의 클라이맥스로 느껴졌다. 그의 작품 활동을 도와주는 어시스턴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작품인데, 작품 설명에서는 어시스턴트가 실수해도 Bowling은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시킨다고 덧붙였다. 때로는 실수가 새롭고 위대한 발견이 될 수 있다는 걸 85세 할아버지 화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Royal College of Art의 훌륭한 졸업생이었고 꾸준한 예술 활동에도 불구하고, Phyllida Barlow처럼 Bowling이 영국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좀 늦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2005년에 흑인으로써 최초로 왕립 미술원 회원이 되었고, 2008년에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콧대 높고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흑인 예술가로 살아가기 쉽지 않았을 텐데 뜻을 굽히지 않고 성실히 자기 길을 간 Bowling이 참 대단하다. 더욱 존경스러운 점은 허리가 안 좋아지고 몸이 약해져서 이제는 앉아서 작업을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작업을 하고, 새로운 실험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열정적으로 자기 세계를 창조하는 Frank Bowling처럼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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