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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Sep 23. 2019

환상을 그리는 예술가,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Tate Britain

언젠가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윌리엄 터너(J.W Turner)의 그림이 가득한 웅장한 메인 전시관을 다 지날 때쯤, 마치 다락방을 올라가는 느낌을 주는 위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한 적이 있다. 미술관을 대충 둘러보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도 있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는 또 다른 전시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작품을 위한 전시공간이었다. 전시관으로 가는 여정도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가는 듯한 특별함으로 기억되었는데, 터너의 그림이 있던 메인 전시관이 지극히 현실의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곳에서는 은밀한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둡고 신비한 그곳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벼룩의 유령(The Ghost of a Flea)> 그 세계의 정령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1819년에서 1820년대에 창작되었다는 이 작품 속에서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영화관에서 마주할 법한 공상과학 영화의 캐릭터가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이 범상치 않은 괴수의 모습을 보며 내게 강렬한 새로움을 선사한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화가를 내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벼룩의 유령(The Ghost of a Flea)>, c1819-20


당시 작은 전시실에 머물러 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들이 최근 테이트 브리튼의 더 넓은 공간으로 나와 특별전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이 특별전을 찾은 나는 <벼룩의 유령(The Ghost of a Flea)>에서 몇 개월 만에 그 괴수와 다시 만났다.

낭만주의 시대 화가로써 상상력의 정점을 보여준 이 작품에서 괴수는 그로테스크하고 괴기스러우면서도 어떤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벼룩의 유령(The Ghost of a Flea)>은 벼룩처럼 피를 빨아먹는, 때로는 남의 고통을 야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면을 묘사한 것 같지만, 윌리엄 블레이크가 어느 날 환상을 본 것을 캔버스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The Great Red Dragon, c1805    


윌리엄 블레이크는 종종 이런 환영을 보았고 상상력이 뛰어나 동시대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이런 괴수 같은 형상을 자주 창작하였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미치광이거나 천재로 나뉘었다. 그가 살던 동시대에는 소수의 동료들 예술 애호가에게 인정을 받는 기이한 예술가였지만, 오늘날에는 시대를 앞서간 창조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002년 영국 BBC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위대한 영국인 100인 중 38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왕립미술원(Royal Academy)에서 수학했지만 과거의 예술작품을 모방하게 하는 그곳의 구태의연한 미술교육을 거부한다. 결국 그는 왕립미술원을 나와 판화 제작자로 생계를 이어가며 나름 성공을 이루고, 동시에 시를 쓰고 그에 맞는 삽화를 판화로 제작하여 시집으로 엮어내 지금으로 말하자면 독립 출판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로써 다른 작가의 책에 넣을 삽화를 의뢰받기도 하였다. 부유한 몇몇 후원자들의 의뢰로 성경, 셰익스피어나 실낙원으로 유명한 존 밀턴의 시에 나오는 삽화를 주로 그렸다. 사탄이나 신의 형벌을 받는 죄인의 이미지가 많은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이런 성경을 기반으로 한 삽화 작업의 영향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의 상상 속에서 사탄은 작품을 통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괴물로 점차 진화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가 살던 시대의 흐름에 맞는 예술가로서의 삶과 본인만의 창조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삶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왔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판화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투박하지만 섬세한 선이 살아있는 예전의 방식을 추구하지만 고객들은 부드럽게 표현되는 좀 더 장식적인 기술을 선호했다.

그는 그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시대가 요구하는 틀에 갇혀있기를 싫어했지만,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독립과 같은 정치적인 정세와 산업혁명이라는 격동기를 겪으며 노예제도와 당시 영국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고 열린 시각을 가진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이런 점이 시인이자 화가로써 창작의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의 예술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게 했을 것이다. 나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상을 자주 보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머릿속에 도저히 다 담기기가 어려운 그만의 상상의 세계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 결국은 그의 현실세계를 지배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뉴튼(Newton), 1795-1805
The Ancient of Days, 1794


그의 작품에는 우리가 학교에서 수학을 배울 때 쓰던 제도기구인 컴퍼스(compass)가 자주 등장한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컴퍼스를 이성과 합리성의 도구로 상징하고 인간의 상상력, 창조성, 자유로운 생각을 위협한다고 여겼다. 그는 “예술은 인생의 나무. 과학은 죽음의 나무"( Art is the Tree of Life. Science is the Tree of Death)라고 표현할 정도로 논리성에 근거한 과학보다는 그 너머에 설명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탐구하는 걸 중시했다.

남들이 미쳤다고 해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으로 승화시킨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에는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거침없이 자유를 표현한 그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에는 나 또한 무거운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던 것 같다. 나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이 내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 안에서는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나에게는 엄마, 아내, 그리고 딸의 의무가 오롯이 존재하고 있으니깐.. 하지만 내면을 단련시키는 내공을 계속 쌓으면 언젠가는 좀 더 나다운 내가 되어, 지금 나의 잡념 때문에 구속받고 있는 자유로움을 온전히 누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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