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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Mar 04. 2020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하는 영국 극단

죽기 전에 봐야 할 '펀치 드렁크(Punch Drunk)'의 공연


얼마 전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공연을 보는 것이 영화를 보는 것보다 관객에게 더 큰 전율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기사를 보았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똑같은 내용인 드림 걸즈(Dream Girls) 영화 보았을 때와 뮤지컬 공연으로 보았을 때 각각 피실험자의 땀샘과 심장박동수의 변화를 체크했다. 그랬더니 뮤지컬을 봤을 때 피실험자의 심박수가 영화를 봤을 때보다 두배나 더 증가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공연은 무대 위 공연자의 에너지가 관객에게 생생히 느껴지는 팔딱거리는 생명력이 응집된 예술매체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현재성과 그 안에서 엮어진 순간의 생생한 긴장감을 즐기기 위해서인지, 심장박동수를 빠르게 하는 어떤 중독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공연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한다.

시작은 중학교 때, 잠실 롯데 월드 근처의 공연장에서 하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학교에서 단체 관람 가면서부터였다. 이후 대학을 공연 관련학과로 진학을 하고 직업도 공연 관련 일을 하게 되어서 자연스레 공연을 많이 봐왔다.                  


그러던 중 2006년 영국으로 공부하러 와서 해외 유수의 공연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영국에 와서 나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하고 실험적인 공연을 보면서 한동안 예술적 충격과 흥분 속에서 지냈다. 이런 새로운 경험들은 극장에서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던 전통적인 연극 방식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그런 실험적인 공연들은 관객과 상호작용을 하고 관객이 좀 더 주체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공연 중에는 관객이 눈가리개를 하고, 공연자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게 하는 <Smile off Your Face(벨기에 극단 Onetroerend Goed)>와 이어폰을 통해 내려지는 지령을 따라 공간들을 돌아다니고 사유하며 그 안에서 드라마를 경험하게 하는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어떤 공연도 있었다.  

영국 극단 Forced Entertainment의 <And On the Thousandth Night> 공연은 객석에 앉전통적인 관객의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배우들이 만담을 하듯이 6시간 넘게 이야기만 늘어놓는 평범한 듯 독특한 형식으로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런 실험적인 공연 중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대단히 영국적인 영국 극단 펀치 드렁크(Punch Drunk)의 공연이 가장 강렬했고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2000년에 설립된 실험 극단 펀치 드렁크는 사실 요즘 대두가 되고 있는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re)"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머시브 시어터"는 관객과 배우 그리고 무대의 경계가 허물어진 관객 참여형 또는 관객 몰입형 공연이라고 알려져 있다.

펀치 드렁크의 공연에서 관객은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극 중 장면이나 사건을 목격하고 연극의 스토리를 스스로 유추해 나간다. 마치 여러 가지 퍼즐 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영화의 장면들을 관객 스스로가 맞추고 편집하여 하나의 영화로 완성하게 하는 것과도 같다.


"이머시브 시어터"에서 관객은 더 이상 극장에서 전통적으로 요구해왔던 점잖고 수동적인 방관자의 모습이 아니라 주체적인 참여자로써 공연을 함께 만들어 나가게 된다. 쉬운 예로, 파티 장면에서는 마치 관객이 파티에 초대된 손님처럼 연기자와 함께 뒤섞여 신나게 춤을 출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특별한 경험이 관객에게 "이머시브 시어터"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하여 계속 이런 형식의 공연을 찾게 만든다.      


출처: punchdrunk.org.uk

펀치 드렁크는 2009년 미국 뉴욕에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어두운 누아르적 영화처럼 표현한 "이머시브 시어터"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를 선보다. 색다른 공연 방식에 매료된 뉴욕의 관객들에 의해 <슬립 노 모어>는 매진 행렬을 이어고, 영화 기생충처럼 대중과 평단을 동시에 사로잡아 공연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성공으로 <슬립 노 모어>는 2011년부터 뉴욕 mckittrickhotel에서 지금까지 장기 공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90개의 방으로 꾸며진 무 세트는 100명의 스태프들이 4개월 동안 제작 매달렸다고 한다.

최근에는 중국 상하이에서도 이 공연을 볼 수 있다. 100달러가 넘는 비싼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뉴욕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도 이 공연을 많이 찾아,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 <슬립 노 모어>의 공연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유학하던 당시에 펀치 드렁크는 한창 여러 공연을 제작하여 선보였는데 나는 운이 좋게도 <파우스트(Faust 2007)>와 <붉은 죽음의 가면(The Masque of the Red Death 2008)>을 연이어 볼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런던 동쪽의 웨어하우스 4층을 통째로 공연장으로 꾸몄고 <붉은 죽음의 가면>은 예전에 시청사 같은 건물로 사용됐던 런던 배터시 아츠 센터(Battersea Arts Centre)의 1~2층 전체 공간을 무대로 이용하였다.


<Small Wonders> credit: Stephen Dobbie

내가 가족을 이뤄 영국에 다시 돌아오고 난 이듬해였던 2018년에는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 가까스로 구한 티켓으로 런던 Bernie Grant Arts Centre에서 아이와 함께 <Small Wonders> 공연을 보았다. <Small Wonders>는 소외된 지역의 아이들과 워크숍을 통해 탄생시킨, 어린이 관객들을 위한 펀치 드렁크의  "이머시브 시어터"였는데 따뜻한 메시지와 함께 감동도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펀치 드렁크가 이토록 관객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시작과 결말이 사건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스토리텔링의 양식을 철저히 파괴한다.


펀치 드렁크의 "이머시브 시어터"는 관객들에게 "특별한 선택권"을 주는데 그것은 관객이 입장할 때 받는 마스크를 쓰고 무대 공간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공연이었다면 관객이 무대 위를 종횡무진 다닌다는 것은 공연 티켓을 무시한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극장 가드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나가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펀치 드렁크의 "이머시브 시어터"에서는 관객이 무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런 불문율의 파괴가 꼭 이뤄져야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이런 프로메나드(Promenade) 형식은 사실 18-19세기에 런던의 정원을 거닐며 음악 연주를 감상하는, 비비씨 프롬(BBC Prom)의 전신인, 프로메나드 콘서트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영국적인 문화가 펀치 드렁크의 공연 형식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이때 관객이 어떤 순서로 어느 공간에 가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순서가 뒤바뀌거나 재배열되게 된다. 어떤 이는 극의 3막부터 공연을 시작하게 되기도 하고, 한 공간에 계속 머무르는 관객은 약간의 텀을 두고 같은 장면을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돌아다니는 동안 보고 경험한 장면들의 퍼즐 조각들을 머릿속에 담아 스스로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


두 번째는 관객의 역할이 주체적인 인터렉티브 공연이라 오락성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펀치 드렁크의 공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관객이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관객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마치 방탈출 카페에 있거나, 컴퓨터 게임 속의 캐릭터를 조정하는 대신 자신이 캐릭터가 되어 가상의 공간에서 직접 움직이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 부활절이 되면 우리나라에서 보물 찾기를 하는 것처럼 부활달걀 찾기인 이스터 에그 헌트(Easter Egg Hunt)를 하는데, 공연이 전개되는 동안 이런 놀이가 자연스럽게 연상되기도 한다.   

이런 오락적인 요소들 때문에 <슬립 노 모어>가 한때 미국에서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펀치 드렁크의 예술감독이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밝다.

또한 공간에 연기자가 나타나면 마스크를 쓴 관객 무리들이 연기자를 쫓아다니 극의 주요 장면들을 마주하는데, 연기자의 대사는 없고 주로 무용적인 움직임을 이용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때 연기자는 때로 관객들에게 짧게 말을 걸거나 터치를 하는 등 간단한 상호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객은 그 어떤 공연에서 경험한 것 보다도 잊지 못할 더 생생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극장을 나서고 나면 관객은 연극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마치 <닥터 후(Doctor Who, 영국 BBC 시간여행 드라마)>의 "닥터"가 되어 영화가 재생되고 있는 화면 속으로 공간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세 번째는 수상의 영애에 빛나는 예술성이 뛰어난 정교한 무대와 소품이다.


펀치 드렁크의 공연은 관객이 여러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봐야 하기 때문에 보통 넉넉하게 여러층이 있는 건물 전체를 무대로 활용한다. 블록버스터급 스케일의 무대 세트에 관객은 쉽게 압도 당해 자신이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여행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관객이 직접 눈으로 가까이 공간을 체험하기 때문에 펀치 드렁크는 자연스럽고 완성도 있는 무대를 제작해서 설치하려고 노력한다.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옷을 보는 것처럼 펀치 드렁크의 무대는 우아하면서도 파격적이고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이다. 이런 예술적이고 시각적인 완성도가 뛰어난 무대 공간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공연을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렇게 공들여 제작된 세트를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펀치 드렁크는 보통 작품당 최소 6-7개월의 장기 공연을 기획한다. 그리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입장 시간에 간격을 두어 관객을 입장시키고, 공연 기간 동안 보통 3-4만 명의 관객을 유치한다.  

관객에게 높은 몰입도와 긴장감을 제공하기 위무대 공간은 항상 어둡지만 정교한 소품과 함께 꾸며져 있다. 그중 펀치 드렁크의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소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스크이다. 공연장에 입장하면서부터 관객이 착용하게 되는 이 마스크는 관객과 연기를 구분해주고, 관객이 익명성을 가지고 좀 더 자유롭게 공연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이쯤 되면 펀치 드렁크의 공연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연극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공연은 연극, 영화, 무용, 미술 등 다양한 장르가 마구 뒤섞여있다.

불안장애나 공황장애가 있는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지만, 호기심이 많고 일상에서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분들에게 펀치 드렁크의 공연을 적극 추천한다.

펀치 드렁크의 작품은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부문에 수상 경력이 있어 공연의 예술성이 보장되어 있으니 그냥 믿고 보면 된다.

우리가 사는 동시대에 연극의 진화가 어느 정도 단계까지 도달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덤으로 당신이 펀치 드렁크의 공연을 보는 동안에는 열심히 돌아다니고 관찰하느라 바빠 일상의 고민을 잠시 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여러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펀치 드렁크의 연극은 인생을 굳이 어떤 틀에 맞춰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펀치 드렁크는 사람들에게 공연예술을 통해 지금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거기서 얻는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던 극단 펀치  드렁크가 이제는 더욱 크게 성장하여 뉴욕, 상하이에서도 절찬리에 공연을 이어가고 있고, 연극뿐만 아니라 손대는 작업마다 잘했다고 상을 받고, 극단의 예술감독 Felix Barrett이 대영 훈장까지 받았다니 감회가 새롭다. 과거 영국의 국립극장을  비롯한 우수한 예술 기관과 연극 공동 제작했지만 이제는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과도 활발히 작업한다. 2016년 삼성과 리한나의 새로운 앨범 홍보 영상인 "ANTIdiaRy"의 크리에이티브 렉터로 참여한 펀치 드렁크는 또 한 번 그들의 예술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다.   

최근에는 주드 로 주연의 <The Third Day>라는 세계 최초의 이머시브(immersive) TV 드라마를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 Plan B와 제작하여, SKY Atlantic과 HBO 채널을 통해 다가오 9월에 선보인다. 생방으로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의 드라마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그들의 예술성이 어떻게 입체적으로 화면에 될지 정말 궁금하고 기대된다.  


항상 진화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며,
 꿈을 실현시키는 혁신적인 펀치 드렁크의 공연을 사람들에게 열렬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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