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한국에 도착하니, 영국에서 나를 한 겹 둘러싸고 있던 이방인이라는 묵직한 긴장감의 갑옷이 벗겨지며 자연스럽게 어깨 위 나의 걱정들도 날개를 달고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비슷한 생김새의 비슷한 무리 안에 속해 있다는 게 무엇보다 나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었다.
물론 첫 하루 이틀은 시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영국에서 느끼던 작고 어중간하고 어색한 인간인 나 자신을 발견했지만, 다행스럽게 며칠 후 그런 느낌은 사라졌다.
도착한 날 뵈었던 아버지는 컨디션이 무척 안 좋으셔서 식사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지만, 이후 지금까지는 좀 나아지셨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은 작년보다 안 좋아지셨다는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외출할 때 현관에 대기 중인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게 되었다. 외출이 힘드니 밖에 나가시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괴력을 발휘하여 혼자선 설 수조차 없는 아버지의 무거워진 몸을 돌보고 계셨다. 나는 엄마와 대화를 나누며 엄마가 아버지를 아직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엄마는 그렇게 고생하시고 가까이에서 느끼시면서도 나와는 달리 아직 마음의 준비를 섣불리 하지 못하고 계셨다. 아버지도 표현은 안 하시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시는지 갈수록 말을 듣지 않는, 서서히 멈춰가고 있는 자신의 몸과 열심히 싸우고 계셨다.
엄마는 우리가 오니 아버지가 잠도 잘 주무시고 마음이 안정된듯하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 그렇다는 걸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고군분투의 부산물인 불안함과 외로움이 조금 가벼워졌다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한국에 더 자주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엄마가 손자와 나란히 누워서 웃고 떠드시는 와중에도 다시 우리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걸 보면서 슬프기도 했지만, 나는 몇 주 후 우리가 떠난 후에도 엄마가 잘 견디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조심스레 갖게 되었다.
인생에서 고통은 우리가 입는 옷 주머니 안 어딘가에 늘 자리하고 꺼낼 수도 없는 것이니까 그냥 들고 다니거나, 가끔 주머니에 구멍이 뚫려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나는 잠자리에 드신 아버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안녕히 주무시라고 귀에 속삭여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