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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Sep 30. 2020

괴짜가 아니라, 진짜

영국 예술가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

내가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를 처음 본건 2018년 로열 아카데미의 여름 전시에 관한 기사를 통해서다.

그때는 그저 키치적인, 여장을 하는 괴짜 예술가인가 보다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올 봄 채널 4를 통해 영국 공중파 TV에 그가 또 등장했다. 이번에는 평상시의 모습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Art Club의 진행자로 나타났다. 가장 최근에 역시 채널 4에서 <Grayson Perry's Big American Road Trip>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인종과 경제적 불평등 등으로 분열된 미국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그레이슨이 돌아다니며 들어보는데, 브렉시트로 분열된 영국의 현 상황에 시사하는바가 크다.


나는 오랜만에 가족 나들이 떠난 지방의 한 갤러리에서 우연히 그의 자서전을 발견했다.

이전까지 나는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클레어(Claire)라는 부가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그에 인간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영국에서 마이너리티 인종인 한국사람으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처럼 메이저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다. (비록 지금 그레이슨은 메이저의 위치에 올랐지만)그리고 결국 나는 그의 자서전 <Grayson Perry: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g Girl>을 읽었다.



영국 예술가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는 2003년에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상(Turner Prize)을 수상했다. 이 때 그레이슨의 또 다른 자아인 '클레어'가 려한 원피스를 입고 시상식장에서 터너상을 수여 받았다. 그리고 그는 2008년 텔레그래프 지에서 발표한 "100명의 영향력 있는 영국 문화예술계 인사"에서 32위에 선정되었다. 이후 2013년 영국 훈장 (CBE)도 받았다.


예술계에서의 화려한 그의 이력 뒤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험난했던 인생사가 있었다.

1965년, 그가 다섯살이 되던 해에 엄마가 바람을 펴서 어린 나이에 부모가 이혼을 한다. 이후 그는 폭력적인 계부 밑에서 공포에 떨면서 살아야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의 테디베어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며 그는 혹독한 유년기에서 살아남게 된다. 그레이슨은 자신의 척박한 현실을 잊고자, 알란미즐스(Alan Measles)라고 이름 붙인 이 테디베어와 함께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곤 했다.

그러다가 그는 10대가 되면서 여장을 하기 시작한다. 계부는 그레이슨의 친 여동생은 험하게 다루지 않고, 오직 그레이슨을 홀대했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슨은 여자 아이들은 스위트 사랑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여장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도 그런 뜻한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또 어떻게 보면 계부의 폭력을 알면서도 방관한 친엄마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것, 안전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보살핌의 결핍에 대한 무의식적인 표현 방식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똑똑하고 공부 잘하던 그레이슨의 성적은 계부의 폭력으로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계부의 부당한 폭력을 도저히 참지 못한 그레이슨은 이미 새가정을 꾸린 친아빠를 찾아가 다시 살게 된다. 하지만 아빠의 재혼녀가 그레이슨을 탐탁지 않아해서 얼마 후 다시 그곳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미성년자인 그레이슨은 어쩔 수 없이 공포의 소굴인 엄마와 계부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살게 된다. 선생님의 권유로 그레이슨은 미대에 진학하게 된다. 계부는 그가 대학 생활을 위해 그곳을 떠나게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결국 그날 이후로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어졌다.

그는 대학시절과 대학 졸업 후까지도 버려진 건물을 전전하며 불법거주 생활을 했다. 미대를 졸업한 후 실업 수당을 받으며 생활하는데, 실업자인 처지 덕에 1파운드(1800원)에 도자기 수업을 듣게 된다. 우연히 등록한 도자기 수업에 흥미를 느끼며, 그는 자신의 예술 언어로 도자기를 선택하게 된다.

그레이슨은 도자기 위에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거칠게 새겨 넣었다. 장식적인 기능을 하는 도자기의 특성과 그가 도자기 위에 펼쳐놓은 투박한 상처들은 서로 충돌을 하며 묘한 예술작품이 되었다.    

Saint Claire 37 wanks across Northern Spain 2003, https://www.saatchigallery.com/aipe/grayson_perry.

그레이슨 페리의 삶은 망쳐서 깨진 도자기처럼 그냥 버려질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비관적인 처지에 좌절하며, 인생을 포기하며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랜 친구이자 전우인 테디베어, 부모 대신 잠시나마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이모와 이모부, 경제적 정서적 불안함을 행위 예술의 즐거움으로 풀게 해 준 여자 친구와 예술 동료들.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님의 표현처럼, 적절한 시기에 그를 옆에서 '부축해 준' 이들이 있었기에, 그는 힘을 내어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한 강인한 그의 의지와 유머 덕분에, 지금의 그가 있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레이슨은 ''이라는 아슬아슬한 도자기가 깨질 때마다, 깨어진 조각을 온 힘을 다해 하나씩 주어, 예술이라는 접착제로 봉합했다. 그리고 지금의 더 단단한 도자기로 재탄생시켰다.


나는 예술가로가 아니라,

그냥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남아줘서 고맙다.


그리고 그레이슨과 클레어를 이해하고 포용해준 영국이라는 사회 한번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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