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한다는 것
영화 <더 미드 와이프(The Midwife)>
살면서 가끔 어떤 일에 확신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내게는 입시를 위해 전공을 선택할 때, 뒤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을 결정할 때, 남편을 만났을 때, 그리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출산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내 친구는 요가를 가르쳤는데, 어느 날 임신한 내게 '자연출산'을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나보다 앞서, 그 친구는 자기 집에서 성공적인 수중분만으로 둘째를 맞이했다.
-'자연출산'은 아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분만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의료 개입이 없는 출산을 말한다. 그래서 산통을 줄여주는 무통주사나, 분만을 촉진하는 분만유도제 등을 투여하지 않는다-
마침 그때 자연 출산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어 나는 TV나 영상, 책으로 자연출산에 대해 미리 알아볼 수 있었다. 생으로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위험부담이 있지만, 나는 겁나지 않았다. 사실 옛날 여성들은 변변한 의료적인 처치 없이도 집에서 아이를 낳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 겪을 출산이지만, 출산에 대한 두려움보다 무언가의 방해가 없는 아이와의 조용한 첫 만남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무탈하게 자연 출산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자연출산의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집에서 조산사를 불러서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연출산 전문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 방법이었다. 나는 첫 출산이고 혹시나 모를 의료사고를 대비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자연 출산 병원에 등록했다.
그래서 자연출산 병원에서 아이를 낳기로 하고, 정기 검진을 받는 산부인과를 그곳으로 옮겼다. 산모의 진통시간을 온전히 기다려주는 자연출산의 특성상 내가 출산할 때 분만실이 확보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출산 날 병원에 도착해서 분만실에 순조롭게 입성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이를 만나는 여정은 내 바람대로 평화로웠다. 내 곁에는 남편과 자연출산을 소개해준 내 친구, 그리고 조산사 두 명이 있었다. 메인 조산사는 침착하게 호흡법을 알려주며 산고의 고통을 덜게하고, 제대로 힘을 줘야 할 때를 알려주었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로 바쁘셔서 아이가 나오기 임박할 때와 탯줄 자를 때 정도만 겨우 얼굴을 내비치셨다. 나의 출산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바로 조산사였다.
영화 <더 미드 와이프>의 주인공 클레어는 조산사이다. 그녀는 산모와 아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클레어의 인생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35년 전에 예고 없이 자신과 아빠의 곁을 떠난 새엄마 베아트리체이다. 당시 베아트리체가 떠난 직후 클레어의 아빠는 자살을 해서, 클레어에게 베아트리체는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암에 걸린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사람은 클레어의 아빠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클레어를 찾아온 것이다. 클레어는 불현듯 나타난 불청객인 베아트리체를 외면하고 싶지만, 혈혈단신인 베아트리체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외면하지 못한다. 베아트리체는 변변한 집도, 안정적인 수입도 가족도 없었다. 결국 클레어는 없는 형편에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는데도 불구하고, 베아트리체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게 된다. 그러면서 클레어와 베아트리체는 과거를 만회하듯이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
베아트리체가 그리워하던 클레어의 아빠를 슬라이드 사진으로 보며, 그들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함께 공유한다. 베아트리체의 여생이 그렇게 계속 클레어와 함께 행복할 것 같았지만, 베아트리체는 또다시 홀연히 사라진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된 건, 베아트리체가 죽기 전에 사랑했던 클레이의 아버지를 사진으로 다시 만나 행복을 추억할 수 있던 것이다.
내가 출산할 때, 내 곁에서 차분하게 출산을 진두지휘하는 조산사가 있어서, 나는 마음이 든든했고 출산에 대한 막막함을 덜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엄마 몸에서 분리가 되고 인생을 시작하는 중요한 순간 조산사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생을 마감하는 데에 있어서도 호스피스 같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죽음이 조금 덜 두렵고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베아트리체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좀 더 가벼워질 수 있게, 행복한 시간을 갖는 데에 클레어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충격의 여운이 쉽게 가시진 않았지만, 이 영화는 내게 '삶'과 '죽음'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해 준 영화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알 수가 없다. 시간이 없는데 그때 가서 허겁지겁 죽음을 준비하는 것보다,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면, 인생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덜하지 않을까?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다보면, 우리는 지금 각자의 인생에 대해 더 확신이 들지 않을까 싶다.
영화 <더 미드 와이프>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던 베아트리체가 이제는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 영화가 해피 앤딩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