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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Jan 05. 2021

마지막 날과 첫 번째 날

2020년은 별자리와 띠별 운세에서 모두 내게 운이 들어오는 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별로 특별한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룬 것도 잃은 것도 없는 일 년이었으니 본전 치기를 한 셈이다. 그래도 그저 멀찌감치 서서 한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아 왠지 아쉬운 마음이 다.


2020년의 마지막  영화와 책과 산책을 오가며 지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는 영국 TV에서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명절 연휴 때 TV 채널에서 영화 편성이 많아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매일 영화를 녹화를 해두었다가 하나씩 골라 보았다. 주로 아이와 함께 가족 영화를 보았는데, 그중에서 우리는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Snoopy and Charlie Brown: The Peanuts Movie)>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스누피 만화가 어릴 때 지루하게 느껴졌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았는데, 연말에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따뜻한 영화였다. 영화의 한글 제목에서는 빠졌지만 스누피 보다는 찰리 브라운이 주인이 되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시작은 찰리의 어린 어깨가 축 지게하는 사건들 펼쳐진다. 찰리는 매번 되는 일이 없어 온 우주가 자신을 방해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찰리에게 인생살이는 피넛처럼 만만한 게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작은 우주가 광활한 어둠에 휩싸인 것 같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 안에서도 찰리를 비춰주는 별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그 별은 찰리의 바람대로 실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아봐 주는 친구를 찾게 해준다. 살다 보면 때때로 세상이 내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은 때가 있는데, 사실 나를 제대로 알아봐 주는 사람 한 명쯤은 늘 곁에 있다.



2020년 12월 31일, 저녁을 먹고 나니 동네 여기저기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두컴컴한 지붕들 너머로 불꽃들이 솟아올랐다가 사라진다.

일 년의 끝을 향해가는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두고 TV를 틀었다. 연말이면 의례하는 작은 콘서트 형식의 쇼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시켜 두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인지 출연 의 수가 줄었다. 그 대신 예전에 방송됐던 화면이 중간중간 재생되었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자미로콰이의 공연이 있어서 반가웠다.

2020년의 마지막 날과 2021년의 첫날 사이에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펼쳤다. 포효하다 흩어지는 굉음과 함께 일 년이라는 시간이 어느 순간 통째로 사라 과거가 되었다.


2021년 새해 첫날, 영국 전체 인구 6800만 명 중에 5만 5천 명이나 코로나 바이러스 일일 확진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기댈 곳은 위험경보하는 무시무시한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고르고 고른 말들로 연결된 문장 사이이다. <잊기 좋은 이름>은 다행히 내가 기댈 공간이 충분한 책이어서 새해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십 대의 새해는 육체도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몸이 예전 같지가 않다. 사실 몸이 달라진 건 출산 후부터였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 일 이년은 내 몸보다는 아이에게 집중한 시기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몸으로 느끼는 신체적 노화에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며 집 앞을 나선다. 산책을 하면 어디선가 정체되어 있던 온기가 발끝까지 닿아서 굳은 몸이 조금 말랑말랑해지는 것을 느낀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동네 공원에서 똑같은 구간을 비슷한 속도로 걷는 것이 어느새 내게 생존을 위한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올해도 작년처럼 공원의 같은 길을 계속해서 반복해 지나갈 것이다. 당분간은 이 정도의 일상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삶을 살 것이다.


새해부터 아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입으로 하늘로 떠난 이들과 이름 모를 누군가의 안녕을 기원한다. 포근한 이불 같은 아이 곁에 나도 잠시 머물러본다. 2021년은 적어도 아이의 작은 두 손만큼의 희망과 아이를 둘러싼 방안 공기만큼의 평온함이 깃드는 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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