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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Mar 08. 2019

할머니는 살아있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처지는 날들이 있다.

어제는 화장실도 가기 싫을 정도로 모든 것이 귀찮은 날이었다.

전생에 나는 물의 기운이 있는지, 집에만 있으면 물이 고여 썩는 것 같이 활기를 잃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전부터 가보려던 전시회를 찾아갔다.  


Royal Academy of Arts에서 열린 Phyllida Barlow의 <cul-de-sac> 전시였다.

 Phyllida Barlow는 아버지가 찰스 다윈의 증손자였던 다윈의 혈통을 가지 영국 조각가로 Rachel Whiteread와 같은 영국의 훌륭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예술학교 선생님이셨다. 예술계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2011년에 영국 왕립 예술원 회원이 되고, 2015년에 영국 훈장을 받고, 2017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영국 대표로 선정된 예술가이다. 2016년 가디언지에서는 그녀가 오랫동안 미술계의 변방에 있었지만, 이제는 가장 주목받는 예술가가 되었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유명세가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그저 예전부터 해온 일을 묵묵히 계속한 것뿐이라는 듯한 태도를 보여줬다.

 

cul-de-sac 이라는 전시 제목부터 어려운데 "막다른 골목" 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불어에서 가져온 영어이다.

전시실에 들어가니 벌써부터 거대한 조각에 압도당한다.

조각상의  높이는 삼층 정도 될 것 같다.

전시장은 세 공간으로 꾸며져 있는데, 첫 번째와 세 번째 공간에 거대한 크기의 키가 큰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시가 어려워서 전시장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어떤 예술 작품은 내 맘에 금방 들어오는데 어떤 작품은 한참을 봐도 잘 모르겠는 작품이 있다. 특히 현대 미술이 그런 것 같은데 이 <cul-de-sac> 전시도 내겐 어렵게 다가왔다.

한참을 본 뒤에 깨달은 것은 이 거대한 조각상의 모습이 자세히 보면 위태 위태해 보인다는 것. 가느다란 나무 골조 위에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척 올려져 있다던지, 흔들면 금방 떨어질 것 같은 폴리스티렌 박스가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모습들은 자신들이 자초한 브렉시트로 궁지에 몰린 현재 영국의 상황을 떠오르게 하였다. 바닷가에 놓인 난파선처럼 말이다. 만약 작가가 현재의 영국을 비판하고 싶어 그런 것이라면 정말 우아하고 세련되게 잘 표현한 것 같다. 전시 제목부터도 뭔가 고상함과 우아함을 뿜어냈듯이.

내맘대로의 해석을 뒤로하더라도, 75세의 이 영국 할머니 예술가 Phyllida Barlow는 그녀의 거대한 조각 작품들을 통해 나는 아직 죽지 않고 건재하다고 위풍당당하게 외치는 것 같았다. 내가 고작 청소기 한번 돌리고 나면 헉헉 대는 것 과는 달리...

그녀의 열정과 에너지를 본받아 나도 늙어서도 계속 무언가 창작을 하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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