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아빠와 네모책 그려 넣기

아빠 유치원 12

by 마이드림

색종이와 빳빳한 종이를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북아트 네모책이 있다.

만드는 과정 전체를 아빠와 같이 하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집중하시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기본적인 모양의 틀은 내가 만들어갔다.


아무리 미니북이라고 해도 안을 채우려면

그림이든 글씨든 뭔가 넣을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빠는 그동안 내가 보여드리는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러다 아빠 컨디션이 좀 좋아 보이는 날에

혹시나 해서 내가 만들어간 재료를 꺼내보았다.

"아빠! 이것 보세요.

이걸로 아주 작은 책을 만들 수 있어요.

요렇게 해서 펼치면 꽃다발처럼 변해요. 예쁘죠?"


내가 네모책 겉표지 부분을 붙잡고

안쪽의 색종이 부분이 밖으로 나오도록

펼치면서 보여드리니까, 아빠가 관심을 보이셨다.

아빠의 손놀림은 나만큼 자연스럽진 않으셔서

별로 예쁘게 펼쳐지진 않았다. 그래도 관심을

보이시는 것이 어딘가 싶었다.

이때다 하고 네모책을 꾸며보기로 했다.


속지에는 그림을 그려 넣기로 하고

이것저것 그림을 보여드렸다.

다른 그림에는 전혀 반응이 없으시다가

많이 그렸었던 하트에 반응을 보이셨고,

나비에도 관심을 보이셨다.


아빠와 놀이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건데,

저번에 많이 그리고 놀았다고 해서 그것들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보여드린다고 해서

잘 따라 그리시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직접 그리는 손의 움직임을 보셔야만

그제야 따라서 그릴 수 있으셨다.


내가 나비와 하트를 그려서 보여드리고

아빠는 그 그림을 색종이에 그리셨다.

펜으로 그리고, 색연필로 테두리도 그리고,

색칠도 하고 그렇게 나비와 하트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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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들어갈 내용은 채워 넣었으니

겉표지를 꾸미고 싶었다.

책 제목처럼 글씨를 써넣으면 어떨까 싶었다.

아빠께 여쭈어 보았다.

"아빠, 표지에다 뭐라고 쓰고 싶으세요?"


아빠는 잠시 가만히 계시더니 뭔가를 쓰셨다.

내가 써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빠가 먼저 펜을 잡고 쓰신 것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빠는 천천히 세 번째 줄까지 쓰시더니

갑자기 동작을 멈추셨다. 그리고는 가만히 계셨다.

아무래도 다음에 뭐라고 써야 하는지

할 말을 잊으신 것 같았다.

"**이가 정신 차리라고 주는 아주 귀중한..."

딱 여기까지 쓰고 멈춰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멈추신 것처럼 보였다.

"아빠, 이렇게 만드는 것이 간단한 북아트예요.

북아트라는 글자는 이렇게 쓰는 거예요."라고

내가 써서 보여드렸다.


북아트라는 글씨를 쓰신 다음에

아빠가 펜을 한참이나 붙잡고 계셨는데,

나는 또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뭔가 생각이 나질 않는 듯한 표정인데,

안 써지는 그 순간을 내가 막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시간이 좀 걸렸다.

아빠가 네모책의 겉표지에 쓰신 글씨는

일기 같기도 하고, 내게 보내는 편지 같기도 한,

글이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아빠를 만날 때마다

"아빠, 제 이름이 뭐예요?"라고 한다.

이날은 늘 하던 질문도 하지 않았었는데,

아빠가 내 이름도 스스로 기억해서 쓰신 것이다.


'**이가 정신 차리라고 주는

아주 귀중한 북아트

아빠는 귀중한 기회로 알고

열심히 받아 수행하고자 했다.'


아빠는 원래 글씨를 잘 쓰셨던 분인데,

기억을 못 하시는 와중에도

필체는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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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도 잊어버리셨던 분께서

딸 이름도 쓰시고 생각이 담긴 글도 쓰시고

이런 날이 있구나 싶어서 뭉클했다.

이런 순간을 다시 한번이라도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 소중했다.


병원약 열심히 드시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색칠하기를 많이 하신

덕분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아빠가

3월에 비해선 많이 좋아지셨다는 생각에 기뻤다.


너무 기뻤던 그 순간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내 집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치매 판정을 받으신 후로 아빠는

씻는 것도 양치하는 것도 잘 안 하시려고 한다.

그래서 아빠 주무시기 전에 양치하시게 하고

주무시도록 하려고 했더니,

방금 전까지 그렇게 멋진 글씨로

나를 감동시켜 주셨던 아빠가 순식간에

오만상을 찌푸리는 떼쟁이 아기로 바뀌셨다.

"안 해... 안 해... 나 잘 거야."라면서 엄청난 짜증을 내셨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주간보호센터에 가셔야 하는 아침마다

엄마가 깨우면 온갖 짜증을 부리신다더니

바로 이런 모습이겠거니 싶었다.


아빠가 고집을 부리실 때도 딸인 내게는

비교적 순순히 잘 따라주시는 편이셨다.

그런 나한테도 양치하자는 말은

철저하게 무시해 버리는 고집불통의 모습이었다.


내가 이동해야 할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소금물로 가글이라도 하시라고 드렸더니,

그 물을 그냥 다 삼켜버리셨다.

다시 드려도 마찬가지였다.


아!

방금 전까지 영재 아들 발견한 기분이었다가

순식간에 가글도 못하고 다 삼켜버리는

아기를 보는 기분이란!

그래, 우리 아빠는 치매였지!


그래도 최근 몇 개월을 통틀어 가장 눈부신

결과물을 보여주신 아빠였다.

글쓰기를 좋아하셨던 아빠의 모습이

그날 잠시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아빠, 저 이제 집에 가요."라고 인사드리고

부모님 댁을 나섰다.


그만하면 꽤 좋았던 아빠와의 놀이였다.

우리의 소중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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