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유치원 14
1.
주무시는 아빠를 깨웠다.
식사를 하셔야 약을 드실 수 있으니까.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아빠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같이 놀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약까지 다 드신 후에 조금 기운을 차리셨다.
"아빠, 우리 놀아요"라고 하니,
의외로 거부반응이 없이 의자에 앉으셨다.
(아빠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날엔
아기처럼 칭얼칭얼 하신다.)
이 날도 아빠가 좋아하시는
패브릭 스티커 놀이부터 시작했다.
저번에 붙이고 남은 조각들이 있어서
하나씩 떼어드렸더니 트리모양처럼 붙이셨다.
"아빠, 또 트리 만들고 싶으세요?"
아빠는 대답이 없으셨다.
그냥 붙이기만 하고 계셨다.
"잘라놓았던 조각들 다 드릴 테니까
아빠 마음대로 붙여보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일반 스티커는 잘 떼시는데
패브릭 스티커는 흐물거려서인지
혼자서 떼는 것을 어려워하셨다.
나는 열심히 뒷면의 종이를 떼어내고
아빠는 열심히 붙이셨다.
분명히 다양하게 자른 모양들이었는데
아빠가 겹겹이 붙여놓은 모양은
처음의 모양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끝 부분은 잘라간 스티커가 모자라서
하얀 종이 공간이 그대로 남았다.
점스티커로 테두리 부분을 붙이면
좀 깔끔해 보이지 않을까 싶어 드렸더니
처음 시작은 반듯했는데 붙이는 과정에서
점점 테두리를 벗어났다.
스티커를 너무 많이 붙여서 지치신 듯하여
점스티커 붙이기는 중단했다.
이것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고,
아빠께 여쭤봐도 말씀을 못하셨지만
마음대로 붙이기에 딱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ㄴ처음 시작은 트리를 닮았었는데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2.
네모책 안을 채워 넣기도 했다.
해봤던 놀이를 다시 시도한 것이다.
검은 색종이로 자른 모양들을 붙인 후에
점스티커를 붙여서 완성해 보기였다.
정답 같은 건 없었다.
아빠가 스티커 붙이기를 좋아하시니까
그냥 마음대로 붙이시라고 한 거다.
내가 자른 검은 색종이 모양도
그냥 즉흥적으로 자른 것이었다.
색종이 뒤에 풀칠도 내가 해드리고
각 페이지마다 하나씩 붙이는 것만
모두 아빠가 하셨다.
내가 마음대로 자른 색종이와
아빠가 마음대로 붙이는 점스티커가 만나
어떤 모양이 완성되는지가 궁금해서
해본 놀이였다.
겉표지는 아빠의 글씨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추석 잘 보내라 -아빠-'라고 내가 써서
보여드리고, 아빠는 그걸 따라서 써주셨다.
추석 연휴에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책이고,
특별한 우리의 그림책이 되었다.
3.
내가 아빠의 손과 발을 대고 그린 후에
색칠만 아빠가 하시도록 해본 적은 있었다.
혹시 두 가지 모두를 직접 하시는 게
가능할지 궁금했다. 그래서 해보았다.
아빠는 몇 달 사이에
선 그리기가 아주 좋아지셨다.
아무리 손을 대고 그린 것이라지만
잘 그리셨다.
손톱도 그려달라고 했더니 기대이상으로
그려놓으셨다.
왼손, 오른손이라고 써서 보여드리고
직접 글씨를 쓰시도록 했다.
필체도 좋으신 아빠 글씨를
조금이라도 더 쓰실 수 있게 하고 싶었다.
4.
세모, 네모, 동그라미...
나는 아빠가 이 세 가지를 못 그리시던
그날이 되게 충격이었나 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지 않으시도록
자꾸만 이 세 가지를 반복하게 된다.
이것 역시도 아빠가 좋아하시는
점스티커를 활용했다.
점스티커 하나만 예시로 붙여두면
나머지는 아빠가 따라서하실 수 있었다.
역시 반복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스티커 붙여서 테두리 다 완성하고 난 후에,
안에는 색칠로 마무리했다.
빠지면 섭섭해서 글씨 쓰기도 했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써서 보여드리고
아빠는 따라서 잘 쓰셨다.
5.
나는 아빠와 놀이를 할 때
가장 기본적인 모양을 주로 활용한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자른 후에
그 모양을 이용해서 남자와 여자 그림을
완성해 보기로 했다.
우리의 놀이는 '함께' 만들어가는
시간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내가 순서대로 종이를 잘라 드리고
아빠는 순서대로 붙이기만 하셨지만
그렇게 함께 하는 동안에 뭔가가 완성된다.
처음엔 생각지 못했는데 하다 보니
남자는 지팡이를 든 마술사처럼 되어가고,
여자는 제법 발랄해 보이는 분위기가 되었다.
색종이 만으로는 그림이 좀 허전해서
또 패브릭 스티커를 추가했다.
마침 스티커가 꽃무늬라서
근사한 꽃밭도 되고 길가에 핀 꽃도 되고
꽃 한 송이도 되었다.
테두리는 점스티커로 마무리했다.
종이인형 놀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덩달아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다.
아빠와 나는,
추석 연휴 때도 이러고 놀았었다.
나는 자르고 아빠는 붙이면서
거의 3시간을 말이다.
놀이를 할 때의 아빠는 생기가 도는데
'놀이 끝'을 외치자마자 눈부터 풀리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놀이를 하고 있을 때만 아빠가 건강해 보인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아빠의 컨디션이 좋질 않아서
놀이를 아예 시작도 못한 날은 있었어도,
어떻게든 시작이 된 날에는
끝날 때까지 집중을 잘하셨다.
아빠는 나와 함께 놀고 있는 시간이 정말 좋으신가 보다.
그래서 너무 다행이다.
덕분에 내게도 소중하고 고마운 추억이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