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내가 이 집에 처음 오게 된 건
선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어요.
나는 제주 기념품 상점에서 한껏 귀여움을
뽐내고 있었던 귤 모양의 메모꽂이랍니다.
어느 날 손님이 나를 손에 들었어요.
"이거 정은 언니에게 선물하면 좋아하겠다."
손님은 나를 구입했지요.
손님의 이름은 남희 씨였어요.
혼자서 제주를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지인들에게 줄 기념품을 하나씩 사면서
다니더라고요.
똑같은 상품을 구입하지 않고
선물 받을 사람들 개성을 생각해서
하나하나 고르는 것 같았어요.
정은이란 사람이 궁금했어요.
어떤 사람일까?
남희 씨가 정은 언니와 통화를 할 때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는지 몰라요.
인간들이 떨리면 먹는 환약이라도
하나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답니다.
정은 씨가 나를 반갑게 맞아줄지도 궁금하고
떨리고 긴장되고 아무튼 여러 가지 감정이
막 뒤섞여 있었어요.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나의 주인인데 당연히 그렇죠.
카페 안으로 들어온 정은 씨를 보는데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었답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죠.
'뭐야. 인상이 차가워 보이잖아.
날 좋아할 느낌으론 안 보이는데?'
어? 그런데 나를 전달했을 때
정은 씨가 너무 기뻐하더라고요.
자기 취향이라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덕분에 나도 긴장이 풀리고 좋았어요.
"아, 이래서 남희 씨가 나를 정은 씨한테
선물한 거구나" 하고 이해가 됐지요.
두 사람이 수다를 떨다가 헤어질 때
나는 남희 씨를 향해 마지막으로
마음의 인사를 건넸죠.
"안녕, 나를 좋은 주인에게 보내주어
고마워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막상 정은 씨네 집에 와서 나는
기대했던 삶을 살지는 못했어요.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라서 당황스러웠죠.
주인은 나를 너무 좋아하고 예뻐했지만
선물인 내가 망가지면 안 된다면서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어요.
내가 원하는 건 내가 만들어진 용도대로
충분히 쓰임을 다하는 일인데,
너무 애지중지하는 거예요.
"이건 떨어뜨리면 깨질 것 같은데?
소중한 선물인데 상처 나면 안 돼."
주인은 손이 잘 닿지 않도록
책장의 제일 높은 칸에다가 나를
놓아두지 뭐예요.
나는 그냥 멀뚱히 놓여 있는
장식품이고 싶지 않았답니다.
"나는 메모꽂이라고요!
나의 집게에 메모가 꽂아져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단 말이에요."
내가 이렇게 구석에 놓여 있으려고
이 집에 왔나 생각하니까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기다려보기로 했답니다.
아직은 내가 신상이니까 좀 아껴주려고
그런가 보다 생각해서 말이죠.
상자에 담겨 구석에 있는 것보단
그래도 불빛이라도 볼 수 있는 책장인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스스로를 달래주었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한 번도 나답게 살지 못했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내 기대와는 달라서 너무 속상했어요.
나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데도,
주인은 계속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보호하고 간직하려고 했어요.
소중하고 귀하게 책장에 계속 세워놓기만 했죠.
책장에선 내가 할 일이 없었어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글자 있다고
자기들끼리만 친하고,
글자가 없는 나랑은 놀아주지도 않았어요.
나는 주인이 점점 야속해지기 시작했죠.
이게 어떻게 소중히 대해주는 거예요?
창살만 없다 뿐이지 책장 감옥에 가둔 거예요.
정작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이건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이 아니라고요.
주인이 제발 나를 나답게 살게 해 주기를
원했답니다.
그렇게 몇 해나 흘러갔지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예요.
해마다의 크리스마스시즌이 또 돌아온 것뿐
내겐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었죠.
그런데 참 이상하죠?
분명 기대도 없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마음이 달랐어요.
'내가 원하는 선물을 주세요'라는 마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답니다.
받을 거라 기대는 없는데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싶었던 내 마음이
산타에게 가닿은 걸까요.
주인이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정말 오랜만에 나를 책장에서 내려주더니
부드럽게 먼지를 닦아주었어요.
"미안하다.
너를 너무 높은 곳에다 두어서
자꾸만 먼지가 쌓이게 만들었네.
그동안 너무 내 생각만 했다.
선물은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사용하는 것도 필요한데,
너를 아낀다면서 오히려 방치한 것 같아.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
"아니에요. 오늘 내 먼지 닦아준 걸로
다 용서할게요."
내가 주인에게 전한 말은 진심이었어요.
책장을 구석을 벗어나니 너무 기뻤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다 용서가 되는 마음이었죠.
주인이 내게 또 말했어요.
"나 너한테 선물 줄 거 있어."
주인이 선물이라면서 내 집게에 꽂아준 것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손으로 쓴
작은 엽서였어요.
"와, 처음 받아본 메모였어요.
야호 신난다! 엽서도 처음 받아봐요.
나한테 제일 좋은 선물은 바로 이런 거라고요.
이제야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알아주는군요!"
나는 오늘 이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메모꽂이의 역할을 드디어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날이니까요.
그동안 나의 집게가 일을 못하고 있어서
하마터면 녹이 쓸 뻔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행복한 메모꽂이로 다시 태어난 오늘의 나는
이 모든 기쁨이 산타가 내게 전해준
선물인 것만 같아요.
오늘만 반짝 선물로 주고 끝나지 말고
앞으로 메모는 무조건 내게 맡겨주기예요? 꼭!
나의 행복한 마음을 내일의 크리스마스에
실어 보냅니다.
"정은 씨도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