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작동화2

행복했던 나만의 특별쇼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며칠 전이었어요.

출연 예약이 잡혀 있었어요.

내가 예약된 곳은 둥근 냄비 안!

된장찌개 파티에 잠깐 출연을 할 예정이었죠.


파티에선 보글보글 쇼가 준비되어 있었답니다.

보글보글 쇼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이날은 된장이 베이스로 깔린 국물에서

여러 채소들이 퐁당퐁당 입수를 하고

보글보글 장단에 맞춰서 푹 익어가면 되는

별로 어렵지 않은 파티였어요.


내가 할 일은 보글보글 장단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쇼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처럼

냄비 안으로 톡톡 경쾌하게 입수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어요.


내 역할은 쉬운 듯이 보이지만

부주의하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해요.

조금만 방심하면 너무 많이 퍽 쏟아져서

메인의 맛보다 더 튀는 일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원래 끓이고자 했던 맛이 나지 않으면 곤란하니

늘 조심해야 한답니다.


조금 슬픈 일은요.

주인은 얼큰한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내가 출연할 수 있는 보글보글 쇼가

별로 많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였어요.

정말 오랜만에 출연하게 된 보글보글 쇼라서

아주 멋지게 고운 빛깔을 내주겠다면서

대기 중이었어요.


나는 보글보글 쇼를 아주 좋아해요.

왜냐하면 보글보글 소리가 이어질수록

냄비 안에서는 아주 근사한 일이 생겨나거든요.

각각의 재료들이 모여서 하나의 요리로 탄생하는

어울림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쇼라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요.

특히 겨울에 끓고 있는 뜨거운 찌개는

정말 최고랍니다.


보글보글 쇼에서 절정의 순간이 언제인지 아세요?

보글보글 리듬을 타던 재료들에서 좋은 냄새가

주방 가득 퍼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정말 최고예요.

이번에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기분 좋게 퍼져나가겠네요.


기본 국물 맛을 책임질 된장과

양파, 두부, 대파, 팽이버섯 등등

오늘의 출연진들은 모두 대기 중이었어요.

퐁당퐁당 리듬에 맞춰 평소처럼 입수만 잘하면 되는

별문제 없어 보이는 쇼였단 말이죠.


그런데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주인의 마음이었어요.

인터넷 영상에서 봤다면서 고추장을 한 숟가락

넣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어? 이건 뭐지?

주인은 된장이 메인인 보글보글 쇼에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쇼를 진행한 적이 없었거든요.

고추장까지 출연을 하게 되면 나는

특별 출연도 못하게 되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고추장이 들어가서 국물의 색이 붉어지면

너무 캐릭터가 겹치잖아요.

이러다 나의 특별 출연이 취소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나도 오랜만에 특별 출연하는 쇼란 말이에요

그야말로 전전긍긍이었죠.


고추장이 갑자기 출연하게 된 보글보글 쇼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언제였는지 아세요?

국물 맛이 어떤지 맛을 보는 순간이었어요.

주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너무 긴장되더라고요.


"음, 생각보다 맛이 괜찮네.

고춧가루 안 넣어도 괜찮겠는걸."


말도 안 돼...........

내가 보글보글 쇼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매운 거 안 좋아하는 주인 때문에

가뜩이나 쇼에 출연할 일도 별로 없는데

평소와 다르게 등장한 고추장한테

내 자리를 뺏기다뇨.

너무 속상했어요.


내가 뭐 이 집에서 큰 거 바란 것도 아니랍니다.

나를 메인에 넣어달라고 한 적도 없고

가끔 특별 출연하는 쇼에 만족하면서

그렇게 지냈단 말이에요.


나도 속 좁은 고춧가루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고추장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렇지만

누구 때문에 출연 정지를 당했다는 생각에

속상한 마음이 먼저 앞서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열심히 주인을 향해 외쳤어요.

"원래 내가 먼저였다고요.

쟤(고추장)는 오늘 출연자 명단에도 없었잖아요.

나도 보글보글 쇼에 출연시켜 주세요!"


쇼에 대한 나의 간절한 마음이

주인에게 가서 닿은 걸까요?

주인이 마음이 바뀌었는지 내가 담긴 통을

손에 잡더라고요.


역시 그럼 그렇지. 내가 살짝 들어가야

더 맛있어 보인다는 거 알겠죠?

기쁨의 미소를 지으려는 바로 그때,

타닥... 하면서 주인의 손에서 뭔가 떨어졌어요.


이럴 수가!

뚜껑을 잘못 열은 때문이었어요.


내가 출연하려던 보글보글 쇼는

둥근 냄비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나는 난데없이 바닥으로 퍽 쏟아지고 말았어요.


흑흑...

쇼에 한번 출연하기가 뭐 이리도 어렵냐고요.

이렇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건 처음이에요.

들어가고 싶다는 냄비에는 안 넣어주고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게 만들다니...!

저 섬세하지 못한 주인의 손을 어쩌면 좋죠?


이렇게 놀라고 속상한 나를 그대로 외면했다면

나 정말 속이 시커멓게 타서

검은 가루가 되어버렸을지도 몰라요.


다행히 나는, 된장찌개 보글보글 쇼에는

출연할 수 있었답니다.

낯선 고추장 조합보다는 고춧가루 살짝 넣은 맛에

더 길들여진 주인의 취향 때문이었죠.


그날의 보글보글 쇼가 끝난 후에

나는 생각이 좀 많아졌어요.

이 집의 주방에서 내 자리가 위태롭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고 보니, 내 몫을 스스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늘은 프라이팬에서 양파볶음 쇼가

진행 중이었는데요.

너무 허여멀건 양파에다 나를 아주 조금만

특별 출연시키려고 했던 주인이었지만

나는 이전처럼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기 싫었어요.


그래서 프라이팬의 허여멀건 양파들을 향해

내 맘대로 돌진하듯 뛰어내렸어요.

퍽... 하고 쏟아지듯이 말이에요.


이건 분명히 양파 쇼였는데 고춧가루인 내가

과하게 양파들을 덮어버리는 바람에

양파들은 난데없이 붉게 물들었죠.


야호! 뭔가 좀 속이 후련했어요.


저번 보글보글 쇼에서 출연 정지 당할까 봐

부글부글 끓던 속이,

한번 대차게 반항을 하고 나니

뻥 뚫리는 기분이 들지 뭐예요.


양파볶음 쇼가 메인인데

고춧가루 퍽퍽 쇼를 만들어버린 나로 인해

양파에게는 살짝 민폐를 끼치긴 했지만요.


그래도 볶아지면 달달해지는 양파가

자신의 사라진 매운맛에 대해 살짝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양파는 나의 갑작스러운 쏟아짐을

은근히 반겨주더라고요.

프라이팬을 온통 붉게 물들이면서 우리 둘만 신났어요.


나의 추체적인 의지로 고춧가루 쇼를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아주 재밌었어요.

나의 반항으로 인해 생긴 맛 때문에

주인은 좀 어이없어했지만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체증이 내려가듯

스트레스가 확 풀리더라고요.


내가 고춧가루이고 매운맛 전문인데

너무 눈치 보고 사느라 순해빠진 고춧가루가

되었던 거 같아요.

사고 한번 크게 쳐봤으니 당분간은 기쁜 맘으로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주인이 화가 나서 주방에서 나를

영영 추방해 버리면 어떡하냐고요?

뭐 그래도 할 수 없죠 뭐.

한번 매운맛 사고 치고 나니까

무서운 게 없어졌지 뭡니까.

이제야 내 모습을 제대로 찾은 것 같아요.


혹시 사고 친 내가 괘씸해서 안 보겠다면

언제든 내 생각이 다시 났을 때 연락하세요.

아마도 나의 정열적인 붉은 존재감을

그렇게 쉽게 잊을 수는 않을걸요?


자, 그럼 다음에 다른 쇼로 만날 때까지 모두 안녕.





고춧가루쏟아지다.jpg

(동화 같은 삽화를 그리고 싶은데 고춧가루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를 몰라서 사진으로 대신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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