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작동화2

밥주걱의 후회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쌓인 먼지뿐입니다.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의 좁은 틈으로 떨어져

먼지 더미 속에 끼어있는 나는 누구냐고요?


나는 밥주걱입니다.


불과 보름 전까진 제이 씨네 집에서

전기압력밥솥의 밥을 푸는 담장이었죠.


밥솥과 함께여야 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 어두운 틈새로

추락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내가 제이 씨네 밥 푸는 일을 한 지는

10년도 훨씬 넘었어요.

제이 씨는 지금 쓰는 압력밥솥을 처음 산 이후로

밥솥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어요.

제이 씨가 그 밥솥을 살 때부터 나는

한 세트였던 상품이었답니다.


제이 씨는 밥솥과 밥주걱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주인이었어요.


요즘처럼 서구화된 식단에서는

밥을 거의 해 먹지 않는 집들도 꽤 많아졌던데

빵 먹고는 못 사는, 밥을 좋아하는 제이 씨네 집에

올 수 있었던 건 보람이 있었죠.


제이 씨는 반찬 만드는 데는 별로

공을 들이지 않는 것 같은데

밥은 꼭 집에서 직접 해 먹는 밥을 좋아했어요.

그것도 흑미밥을 좋아했지요.


요리에 별로 관심이 없는 걸로 봐선

밥도 잘 안 할 것 같은 사람인데,

의외로 밥만큼은 꼭 직접 짓는 밥을 해 먹는 걸 보면,

가끔 신기하기도 했다니까요.

요즘처럼 즉석밥도 종류별로 많이 나와 있는

세상에 말이에요.


나는 압력밥솥이랑 10년 이상을

파트너로 붙어 있다 보니

지긋지긋해서 한 번씩 대판 싸우기도 했었거든요.

우리 둘이서 싸워대는 소리가

인간들의 귀에 들렸더라면

무지 시끄러웠을 겁니다.


10년째 되던 해에 밥솥이 고장 나기에

이제 새로운 밥솥이랑 만나게 되려나 기대했더니

제이 씨는 가깝지도 않은 서비스센터까지

밥솥을 들고 가서는 기어이 고쳐오더라고요.

요즘은 예전과 달리 신상 나오면

바꾸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래도 뜻밖에 소득은요.

10년 이상 쓰고 고장 났으니 폐기 처분되는 줄 알고

잔뜩 겁먹었던 압력밥솥이 서비스센터 다녀온 후론

달라졌어요. 다시 태어난 기념으로

내게 더 이상 잔소리도 안 하고 친절해졌어요.

덕분에 밥솥과 싸울 일은 줄어들어서 좋았는데요.


문제는 10년 넘게 밥 푸는 일만 하다 보니

이젠 내가 지겨워졌답니다.

내가 나의 일이 지겨워진 데는 제이 씨도

한몫을 했어요.


제이 씨네는 도무지 그릇이 바뀌지를 않아요.

늘 똑같은 그릇에 비슷한 음식만 먹으니

내가 하는 일이 더 단조롭게 느껴질 밖에요.


여자들은 예쁜 그릇도 사고,

컵도 예쁜 거 사고 그러지 않나요?

그런데 제이 씨는 예쁜 거 보며 감탄은 잘하면서

정작 사는 건 없어요.


살면서 한 번씩 분위기 전환을 할 만도 한데,

제이 씨는 그릇 같은 걸 사는 걸 못 봤어요.

사은품으로 받은 접시,

엄마가 주신 그릇 같은 것만 써요.

처음 밥솥을 살 때 접시 몇 개 산거 빼고는

그 이후로는 그릇 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어쩌다 잘못 떨어져서 그릇이 깨져버리면

이제 새 그릇 좀 사려나 기대해 봤지만

버리고 나면 그냥 남은 걸로 쓸 뿐

새 걸로 바꾸는 법이 없어요.


하긴 요리게 관심도 없는데,

그릇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죠.

나도 좀 다양한 밥그릇에 밥을 퍼야

눈이라도 즐거울 텐데,

이건 뭐 늘 똑같은 모양의 그릇에만 밥을 푸고 있으니

일상이 지루하더라고요.


내가 제이 씨네 처음 오고 나서

단 한 번도 주방 분위기가 바뀌질 않았어요.

제이 씨는 지루한 걸 잘 못 느끼는 사람인가 봐요.


그래도 변하는 게 있긴 하더라고요.

10년 동안 제이 씨도 늙었잖아요.

언젠가부터 그렇게 열심히 짓던 밥을

예전만큼 안 하기도 하고,

심지어 즉석밥도 한 번씩 사 먹더군요.

제이 씨도 이젠 밥 하는 거 지겨워하면서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아싸 신난다를 외쳤지요.

밥 냄새 너무 맡아서 지겨웠는데

조금씩 쉴 수도 있고 얼마나 좋냐고요.


압력밥솥도 밥 하는 걸 쉬면

취사가 시작되었다거나 완료되었다고

안내방송하는 거라도 쉴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했답니다.

밥솥과 밥주걱이 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정도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밥을 해왔는지 짐작이 되지 않나요?


물건 사는 욕심도 없고,

집안 분위기 딱히 바뀌는 것도 없고,

그렇게 밋밋하게 사는 제이 씨는 물건도 잘 안 사는데요.

심지어 재활용품까지 잘 사용하는 걸 보고

나는 평생 이 집에 사는 동안만큼은

절대 버려질 일은 없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거든요.


그런데요.

믿던 제이 씨에게 발등 찍혔어요.

제이 씨가 나를 버렸어요.


그날은 제이 씨가 밥솥에서 밥을 푸는 중이었는데요.

아, 글쎄 밥을 풀 때 손의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제이 씨의 손에서 내가 미끄러지면서

냉장고 옆의 좁은 틈으로 빠져버렸답니다.


나는 제이 씨가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걸 못 봤으니

당연히 나를 꺼내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긴 자를 넣어서 톡톡 건드리는 거예요.

내가 간지러워하면서 살짝 몸을 비트는 바람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됐어요.


제이 씨가 딱 한 마디를 했어요.

"짜증 나!"

그러더니 나를 꺼내기 위해서 더 이상은

노력을 하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거예요.

그때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고장 나면 들고 가서 고쳐다 쓰는 사람,

음식 배달통까지 씻어서 재활용해 쓰는 사람,

분명 쓸 수 있는 건 쉽게 안 버리는 사람이었다고요.


어떻게 내가 망가진 것도 아닌데

먼지 구덩이에 빠진 나를 보면서 구출도 안 해주고

짜증 내면서 돌아서냐고요.


내가 제이 씨를 위해 일한 세월이

강산도 변할 세월인걸요.

정말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나를 더욱 절망에 빠뜨린 건요.

제이 씨는 원 플러스 원으로 파는

천 원짜리 밥주걱을 사 와서

이미 개시를 했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쉽게 잊히고 대체되는

존재인 줄 알았더라면,

밥 푸는 거 지겹다고 하지 말고 더 소중히

생각할 걸 그랬습니다.


밥 냄새 지겹다고 배부른 소리 하다가,

청소하기도 힘든 구석의 먼지 속에 처박히는

신세가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밥주걱 생의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는 걸

너무 모르고 살았습니다.


밥솥은 새 주걱을 맞이하여

이미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는데

내 밥주걱 생만

먼지 구덩이 속에 처박혀버렸습니다.


제이 씨가 이사를 간다거나

냉장고를 바꾸지 않는 이상은

절대 나를 꺼내줄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저처럼 불평불만 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하세요.

매사에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세요.


나도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밥솥이랑 싸우던 그때로,

밥풀들이 내 등에 업혀서 간지럽히던

그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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