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동화
휘리릭 틱...
"아... 아야야... 너무 아파요!"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요?
여기는 어디죠?
이 딱딱하고 단단한 바닥은 뭐죠?
내 옆에 서 있는 이 기둥은 뭐고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요.
내가 누구인지, 왜 처음 보는 이곳에
내가 누워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다가 내가 이 숲 속 바위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게 된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인간들의 목소리가 한 번씩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곳은 꽤 유명한 숲인가 봐요.
그동안은 굉장히 조용하기만 하더니
오늘따라 바위 옆쪽에 인간이 한 명 보였어요.
한참 부스럭거리던 인간이 급히 달려가 버리더라고요.
가방 안에서 까맣고 길고 뾰족한 것이
툭 떨어져 버린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에요.
어? 저건 뭐지?
사이사이에 빈틈이 있는 이빨을 가진 괴물인가?
내가 놀라서 움찔움찔하고 있는데,
녀석이 투덜대면서 내게 말을 걸었어요.
"야, 아이스크림 막대기!
너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니?"
"아이스크림 막대기? 그게 내 이름이야?"
"어머, 너는 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니?"
"실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몰라."
"세상에... 넌 어쩌다가 기억을 잃었니?
내가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건,
너는 아이스크림 막대기였단 사실이야."
"아, 어쩐지 내 몸에서 계속 달달한 냄새가 나더라.
그런데 너는 누구야?
왜 그렇게 무서운 이빨을 많이 가지고 있어?"
"내가 보기에 너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거 같아.
그렇지 않고선 어떻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니?
나는 빗이라고 해.
인간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주어
예쁘게 정리하는 일을 해.
내가 그동안 예쁘게 만들어준 인간들의 머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너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와... 그래? 빗 너는 참 대단하구나.
멋진 재주를 갖고 있는 걸."
"맞아. 나도 그동안의 내가 정말 자랑스러워.
아까 우리 주인이 가방 속 물건을 찾는다고
한참을 뒤적이다가 내가 여기 떨어진 걸 모르고
가버리기 전까진 그저 행복했던 빗이었지.
우리 주인이 그동안 주로 나만 사용했거든.
내 단짝 가위도 내가 없어져서 슬퍼할 거야.
우리 주인이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서
내가 여기 떨어진 걸 모르고 있을 텐데,
그걸 생각하면 너무 슬퍼.
나중에 알게 된다고 해도 이곳으로 나를
다시 찾으러 올 일은 없다는 게
내가 지금 너무 슬픈 이유야. 흑흑...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렸어."
"왜? 주인이 너랑 사이도 좋았던 거 같은데
왜 너를 다시 찾으러 안 온다는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너를 다시 찾으러 올지도..."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귀중품이 아니거든.
내가 만약 아주 비싸고 귀한 물건이면
경찰에 신고해서라도 찾으려고 하겠지만
나는 그냥 뷰티아카데미에서 나눠주던
플라스틱 빗 한 개에 불과하거든.
인간들은 비싸고 귀한 게 아니면 잘 찾지 않아.
일부러 나를 버린 건 아니지만 잃어버린 이상은
다시 주인한테 돌아가기 어렵다는 뜻이야.
나는 오늘부터 혼자가 됐어.
그걸 알면서도 마음으로 인정하기 힘들 뿐이야."
아, 오늘 처음 만난 빗이란 녀석은
말하는 것만 보고 있어도 왜 이렇게 짠한지 모르겠어요.
불쌍하기로 치면 나야말로 빗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고요.
결정적으로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내가 빗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더라니까요.
그동안 혼자 덩그러니 있었던 시간 때문인지
혼자가 됐다고 우는 빗이 더욱더 안 되어 보였던 거 같아요.
그래서 잘할 줄도 모르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어요.
"아니야, 빗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이곳 숲 속 바위 위에 나도 있잖아.
우리를 찾으러 오는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여기서 같이 기다리자.
우리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도 않고
너무 좋을 거 같아.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 줄게."
"막대기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너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인간이
너를 여기다 버리고 간 거 같은데?
버렸는데 찾으러 오겠니?"
"아니야. 내가 아무리 기억이 안 나도
이렇게 좋은 숲 속 바위 위에다
나를 버렸을 리가 없어."
"잠깐만! 너 지금 뭐랬니?
너 이때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곳에
있었던 거야? 여기가 숲 속이고 바위 위에
놓여있다 믿으면서?"
"그럼 여기가 숲 속이 아니야?
숲 속에 나를 데려왔던 누군가가 이곳에서
나를 잃어버린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럼 여긴 어디야?"
빗은 정말로 안 됐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어요.
"아이고,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거구나?
잘 들어! 여기는 어디냐면..."
빗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해주려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내 눈을 한번 쳐다본 빗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래, 여긴 숲 속이 맞아.
비록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막대 너랑 나, 우리 둘이라도
여기가 숲 속이라고 생각하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겠냐.
우리 이 숲 속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보자는 말이지."
"와, 정말?
그동안은 혼자 있어서 좀 무서웠는데
이제 너랑 같이 있으면 너무 좋겠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너무 신이 나서 막 떠들어댔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빗은
뭔가 눈이 슬퍼 보였어요.
나보다 훨씬 더 몸이 길어서인지
그 슬픔이 길게 길게 온몸으로 이어지며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땐 정말 몰랐어요.
빗이 나를 배려해서 무슨 말을
꾹 눌러 참았는지를 말이에요.
"빗, 너 자니?"
"아니 아직 안 자."
"있잖아. 난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어.
만약에 나도 너처럼 주인이 있었던 거면
우리 주인이 나를 애타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주인도 보고 싶은데
친구인 너를 다시 못 보게 되면
얼마나 보고 싶을까?
우리 주인이 나를 찾으러 오면
나는 주인을 따라가야 되겠지?
아, 그걸 생각하면 벌써 슬퍼."
"치... 뭐야.
막대 너 그렇게 나를 좋아하고 있었어?
고맙네. 그렇게 말해줘서.
그럼 너네 주인이 천천히 오라고 기도해.
그러면 우리가 좀 더 오래 볼 수 있잖아."
"근데 빗 너네 주인이 먼저 나타나서
너를 데려가 버리면 나는 어쩌지?"
"걱정 마!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네가 기억을 잃어서 인간들을 몰라서 그러는데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인간들은 귀중품 아니면
잘 안 찾아.
멀쩡한 물건도 싫증 났다고 버리는 게 인간들인걸?
우리 주인은 그날 날 잃어버린 걸로
나와의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벌써 잊었을걸.
근데 막대야! 이제 제발 좀 자라.
네가 말이 많으니까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잖아."
빗은 가끔씩 무지 퉁명스럽게 말할 때도 있지만요.
그래도 나는 잘 알아요.
빗이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나를 얼마나 아껴주고 있는지 말이에요.
빗이 옆에 있으면 나는 늘 안심이 됐어요.
내가 빗을 정말 좋아하고 든든하게 생각한 게
언제부터였냐면요.
무서운 개미가 내 옆에 자꾸만 들러붙어있던
그날부터였어요.
내 몸에 남아있는 끈적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의 맛 때문인지
무서운 개미들이 내 옆에 다가올 때가 많았는데요.
그럴 때마다 빗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었답니다.
내가 빗을 처음 봤을 때 무서워했던 그 모습으로
개미들에게 인상을 빡 쓰면서 겁을 주어 쫓아내곤 했어요.
내 친구 빗 때문에 나는 정말 든든했어요.
요즘 나는 그런 생각도 하게 됐어요.
내 친구 빗만 있다면 나는 이제 아무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에요.
비록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사랑받는 존재였을 거라
전혀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에야 드디어 알게 되었답니다.
왜 우리 주인이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는지 말이에요.
우연히 나를 발견한 인간이 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어머머, 어떤 얌체가 쓰레기를 이렇게
기둥 뒤에다 숨기듯이 버려놓고 갔을까?
이 쓰레기 조합 한번 되게 신선한데?
어떻게 아이스크림 막대랑 빗이 같은 공간에 버려진 거지?"
나는 그 말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내가 쓰레기라고?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버려진 쓰레기일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묻고 싶었어요.
내가 왜 쓰레기라고 불리는지 말이에요.
도대체 왜 나와 내 친구 빗까지 함께
쓰레기 취급을 받는 건지 그것도 화가 났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방금 전에 충격적인 말을 하던 여자가
내 친구인 빗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이리저리 막 뒤집어 보는 거예요.
"빗에 뷰티아카데미라고 쓰여있었구나?
동네에선 이런 학원을 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가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 이렇게
버려지게 된 걸까.
그나저나 사람들 너무 한 거 아냐?
이런 플라스틱 빗을 길에다 버려두면
누가 치우라는 거야?"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빗과 나는 버려진 게 아니에요."라고
계속 외치고 있었어요.
여자는 내 친구를 내려놓지도 않고
계속 보기만 하더라고요.
나는 저렇게 높은 데서 빗이 어지러울까 봐
걱정이 됐죠.
그때였어요.
여자는 버스가 오고 있다면서 빗을 거의 던지듯이
내려놓으면서 뛰어가버리지 뭡니까.
빗이 여자의 손에서 내동댕이쳐지듯 떨어질까봐
나는 너무 놀라서 "악" 소리를 질렀어요.
빗이 너무 위험해요!
바로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이,
아이의 입과 손에 잔뜩 묻은 아이스크림을
아이 엄마가 열심히 닦아주고 있었어요.
아이스크림은 녹아서 질질 흘렀고,
안 되겠다 생각한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어요.
아이는 자기 걸 먹었다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그 때문에 아이 엄마가 정신이 없어졌고
하필 그때 버스가 온 거예요.
버스도 타야 하고 쓰레기도 버려야 하고
너무 서두르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던 거예요.
손에 들려있던 나를 놓치고 떨어지는 순간
정류장 옆쪽의 기둥에 세게 부닥치게 되고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거였네요.
이제야 그날의 상황들을 알게 됐어요.
버려진 장소가 정식 쓰레기통이 아니었을 뿐
나는 아이스크림이라는 쓸모가 끝나서
버려져야 할 막대였던 셈인 거죠.
사실을 알고 보니 머릿속이 뱅뱅 돌면서 멍해졌어요.
설마설마했는데 내가 정말로 쓸모를 다한
물건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속이 울렁울렁하더라고요.
빗과의 대화를 통한 그날의 궁금증도
이제야 풀렸어요.
내가 버려진 쓰레기라는 것을
빗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반드시 데리러 올 거라고 믿고 있는 나에게
쓰레기라서 버려진 거라고 실망감을 줄 수 없었던
빗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어요.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성격인데도
가슴에만 꾹 눌러 담았을 그 말이,
나를 위한 빗의 그 마음이 고마워서 눈물이 납니다.
너무 고마운 내 친구, 배려심 가득한 내 친구입니다.
한없이 해맑기만 한 나를 보며 답답했을 거 같아서
너무 미안하기도 해요.
빗은 말하더군요.
계속 모르고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이에요.
기억도 없는 내게 굳이 슬픈 현실을 알려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나라도 좋은 생각만 하면서 기쁘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다고 하네요.
이제와 생각해 보면 좋은 친구를 만난 덕분에
그저 즐겁게 지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현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빗이 나를 따듯하게 바라보며 했던 말이
나의 놀란 마음도 어루만져 주었답니다.
"막대야!
인간들에게 네가 쓸모 없어졌다고 해서
너의 소중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였어.
그것만 기억해!"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만약에 말이에요.
내가 버스정류장 뒤편에 버려지던 그날에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내 친구 빗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감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평온한 마음도 가질 수 없었을 거예요.
내가 길에 버려졌던 쓰레기라고 슬퍼하고
분노만 하다 내 생이 끝나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나의 기억이 사라졌던 순간은,
나에게 찾아온 마법의 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