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조림을 지켜낸 걸 축하해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말이에요.

내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겉으로 보이는 색이 달라졌는데요.

그럴 때면 마치 새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그 색깔들에 설렘을 느끼곤 했죠.


오늘은 내 안에 무엇이 담기려나

콩닥콩닥 설레던 마음으로 기다리던

그 순간들이 나는 참 좋았어요.


나는 반찬통이랍니다.

음식이 담기는 아랫부분은 유리,

뚜껑 부분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요.

나는 활용도가 높아서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왔어요.


우리 주인은 요리를 잘하진 못하는데

건강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들을

내게 소중히 담아주곤 했거든요.

그래서 나도 그것들을 신선하게 잘 지켜주는

반찬통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렇게 나의 일에 의미 부여를 하며

매 순간 열정이 가득했던 때가

나에게도 분명히 있었답니다.



그동안 나에게 주로 담겼었던 음식은

무침이나 볶음, 조림이었는데요.

요리한 음식들이 담기고

설거지로 씻김을 당하고

그러한 패턴을 반복하는 사이에

꽤 많은 시간들이 흘러갔어요.


신입 반찬통이었던 내가 어느새

10년 차 반찬통이 되었지 뭐예요.


무슨 일이든 10년쯤 반복하면

제법 능숙해지는 것이 장점이지만,

한편으론 너무 익숙하니까

더 이상은 신선함이나 재미를 못 느끼게 되는

단점도 생길 수 있더라고요.


새로운 요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주인은

매번 만들어 먹는 음식들이 비슷했거든요.

늘 비슷한 반찬을 후다닥 빨리 만드는데

다양한 음식을 담아보고 싶은 내 입장에선

1년 내내 똑같은 옷만 입는 기분이었달까요.


늘 비슷한 음식들만 만들고 담다 보니

이제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고

굉장히 심드렁해진 상태였답니다.


특히 올해 여름은 더 심했어요.

폭염이 지속되는 날들이 너무 길다 보니

우리 주인만 축축 늘어지는 게 아니라

반찬통인 나도 덩달아 축 늘어지더라고요.


뜨거운 음식이든 찬 음식이든

내게 담기는 것 자체가 싫었어요.

이런 지치는 일은 처음이었죠.

그냥 시원한 냉장고 안에만 있고 싶고

냉장고 밖으로는 나오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너무 덥다는 핑계로 주인도 나도

모든 것이 귀찮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결국 문제가 발생하더라고요.



주말 오후였어요.

식사 시간이 되어 냉장고에서

우리들(반찬통)을 꺼내려던 주인은

갑자기 우리를 겹겹이 쌓기 시작했어요.


날도 더운데 반찬통을 하나씩 꺼내어

여러 번 옮기는 것도 귀찮다는 이유였어요.

한꺼번에 빨리 꺼내어 접시에 덜은 후에

재빨리 다시 냉장고에 넣겠다는 계획이었죠.


그때부터 이미 난 불안하더라고요.

팔힘이 좋지도 않은 주인 양반이

우리 반찬통들을 한꺼번에 다 들 수

없을 것 같다고 내가 말렸거든요.


"제발 부탁인데 쓸데없는 욕심내지 말고

반찬통 하나씩만 옮기세요.

한꺼번에 옮기려면 큰 쟁반이라도 받치라고요."

그렇지만 나의 외침은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주인은 쟁반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반찬통들 몇 개가 겹겹이 쌓여

옮겨지던 순간,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어요.


다른 반찬통들은 꿋꿋하게 잘 버티던데

제일 위에 쌓여 있던 나는 무서워서

몸이 덜덜덜 흔들리더라고요.

아래를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 고소공포증 있단 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흔들흔들 떨고 있음을

주인이 재빨리 발견하고

그때라도 멈춰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주인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한꺼번에 많은 통을 옮기려고 했을까요.

내가 계속 흔들흔들 휘청이니까

주인은 손이 미끄러지며 나를 놓쳐버렸답니다.



그다음은 짐작이 되시나요?

아... 정말 생각하기도 싫지만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어요.


분명히 바닥에 떨어질 때 충격이 꽤 컸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내가 멀쩡하더라고요.

아니 괜찮다고 믿고 싶었죠.

바닥에서 양념 냄새가 난다거나

국물이 새어 나온 느낌은 일단 없었거든요.


얼핏 보면 내가 너무 멀쩡해 보였어요.

어쩌면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튼튼한

반찬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어떡해. 괜찮은 것이 아니었네.

플라스틱만 두 조각으로 부러진 건가 했더니

아래쪽 유리 부분도 깨졌잖아."


와, 정말 우리 주인이 너무 하네요.

내가 그렇게 세게 떨어졌는데

어떻게 멀쩡할 거라 생각할 수가 있죠?

부러지고 깨진 게 당연한 결과라고요.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고집부리더니

이제 속이 시원한가요?

당신만 내 말을 좀 들어주었다면

나는 계속 반찬통으로 지낼 수 있었단 말이에요.


주인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 치솟고

내가 망가진 게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어요.

이렇게 될 거라 생각은 못했단 말이에요.

냉장고에서 나가다 말고 갑자기

망가질 거라 생각하는 반찬통이 어딨겠어요.


모든 것들을 돌이킬 수가 없단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우리 주인이 혹시 나를 고쳐볼 방법을

찾아내진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잠시 가져봤었죠.



그렇지만 금방 알겠더라고요.

한번 깨지고 금이 간 유리그릇은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유리반찬통인 내게 지속력도 없는

테이프를 붙일 수도 없고,

입에 들어갈 음식을 담아야 하는 그릇인데

강력 접착제를 붙일 수도 없잖아요.

내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임을

나도 주인도 잊고 있었지 뭐예요.


아무리 쌓인 위쪽이 무서워도

내가 덜덜덜 떨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아니 그전에 주인이 우리 반찬통들을

쌓아서 옮기지만 않았어도 좋았을걸.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너무 익숙한 게 많아졌다는 이유로

자신만만했던 것이 문제였어요.

그러면 방심을 불러오거든요.


조금만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몸에 금이 가고 부서진 지금,

나는 이제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아쉬움을

깊이 느끼는 중입니다.



생각해 보면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는 언제든 깨질 수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나를 무사히 잘 지켜준 주인에게

이제야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곤두박질을 치고서도

완전히 박살 나는 큰 부상만은 피한

나 자신도 칭찬해주고 싶어요.


내가 생각보다 더 단단하게

만들어진 통이었다는 것이

이 순간 정말 고맙게 느껴집니다.

나의 망가짐으로 인해

누군가를 다치게 만들지 않았으니

그것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나는 내가 너무너무 자랑스러워요.

생각지도 못한 위기의 순간에도

담겨 있던 음식을 보호하고자 하는

반찬통으로의 역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던 거라고 믿어요.


마지막으로 내게,

꼭 해주고 싶은 칭찬이 있어요.

"잘했어! 두부조림을 지켜낸 걸 축하해."




부서진반찬통조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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