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내 이름은 단!

어쩌다 보니 대봉이의 옆자리에 함께 있어요.

우리가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이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우리가 이렇게 옆에 있게 된 건

친해서도 아니고 서로를 좋아해서도 아닌,

어쩔 수 없는 자리배치 때문이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냉장고에 있는 다른 친구들은

주로 흰옷이나 초록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 당시 주황 옷을 입은 나는 혼자만 있어도

옷 색깔이 눈에 띄어 신경 쓰였거든요.

같은 가문의 대봉이까지 보란 듯이 내 옆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건 뭐 대놓고

우리 감 가문의 홍보타임 같아서

너무 부끄러웠어요.


우리 둘이 눈에 띄는 것이 싫은 이유는요.

예뻐서 주목받는 거면 기분이라도 좋을 텐데

이렇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도

우리는 벌써 몇 달째

존재감은 0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답니다.


대봉이는 아예 대놓고 미운털 박혀서

주인에게 외면당했고요.

외면당하는 대봉이와 같은 가문이라는 이유로

나도 덩달아 잊힌 존재가 되었어요.



나는 대봉이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해요.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몸의 대봉이는

친구랑 같이 냉장고에 들어왔었는데요.

둘은 아직 홍시가 되기 전인 대봉감이었어요.

대봉이보다는 같이 온 친구가 조금 더 빨리

말랑말랑 홍시로의 변신을 끝내는 바람에

주인의 간식으로 선택되었답니다.


그런데 아주 기분 좋게 최상의 맛을 선보이러

밖으로 떠난 대봉이의 친구가

주인의 입속으로 들어간 이후,

주인은 큰 봉변을 겪게 되었다지 뭐예요.


홍시를 먹은 이후로 주인이

아무리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괴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답니다.

배설물이 도무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하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아시나요?

인간 세상에선 그 병을 '변비'라고 부르죠.


배설을 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쳐본 주인은

홍시가 되기 위해 대기 중인 대봉이를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됐지 뭡니까.

또 화장실에 못 갈까 봐 두려움에 떨게 되었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의 대봉이는 동글납작했던

단감인 나에 비해 키도 컸답니다.

딱 봐도 시원시원하게 매끄럽게 생겼고

홍시가 되는 순간 정말 제대로 단맛을

선보일 거라 기대되는 감이긴 했어요.


그런데요.

스스로가 자기 잘난 걸 알아서인지

좀 잘난 척을 많이 하더라고요.

홍시가 되기 전엔 떫은맛을 가져서인지

그때의 대봉이는 별로 좋은 성격이 아니었어요.

냉장고 친구들에게 점점 "쟤는 뭐니?"라는

안 좋은 인상을 심어가던 대봉이가

결정적으로 미운털이 박힌 사건은

당근에게 한 말 때문이었어요.




하루는 당근이 수줍어하면서 대봉이에게

인사를 건넸어요.

"안녕? 우리 옷 색깔도 비슷하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그랬더니 대봉이가 뭐랬는지 아세요?


"아니, 싫은데! 우린 하나도 안 비슷해.

나는 지금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을 거니까. 그리고 내 피부는

너처럼 딱딱하지 않아.

촉촉함을 머금은 말랑말랑 연한 피부로

변신 중이거든. 이제 곧 홍시가 될 거야.

근데 너는 늘 단단하잖아.

너처럼 혼자서는 말랑해지지 못하는 애가

어떻게 나의 이 말랑말랑 감성을

이해할 수 있겠니?

그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말을 들은 당근은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이더라고요.

대봉이가 당근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같은 가문의 내가 막 화끈거리는 것 같았어요.


다른 친구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대봉이가

너무 꼴 보기 싫었죠.

말랑말랑 홍시는 뭐 자기만 가진 특권인가요?

단감인 나도 조금 더 오래 버티면

그깟 홍시 될 수 있다 이거예요.

자기 혼자만 유일하게 홍시 되는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뭘 저리 잘난 척을 하나 싶었어요.

그래서 같은 가문인 내가

대봉이와 대화를 좀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대봉아! 너 당근한테 너무 심했어.

당근은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데

꼭 그렇게 얘기를 했어야 해?

피부 말랑한거랑 딱딱한 것이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란 것이 말이 되니?

너처럼 피부만 말랑말랑해지면 뭐하냐.

원래 몸이 단단한 당근보다

마음은 네가 훨씬 더 딱딱한데!!!

네가 그렇게 잘난척하는 홍시 되는 그거!

너만 할 수 있는거 아니야.

나도 가능해."


"어머! 얘 좀 봐라. 홍시되는 감이라도

다 같은 감인 줄 아니?

나는 둥글넓적한 너랑 달라.

내가 너보다 갸름하고 키도 크다고!

어디 비슷한 몸인 척 뭉뚱그려 한 팀인척하는 거니?

그렇게 안타까우면 나한테 뭐라 하지 말고

네가 당근과 친구 해주면 되겠네.

안팎으로 단단한 너랑 딱 어울리는구먼."


"야, 대봉! 말은 바로 해야지.

너랑 나랑 키로 얘기하면 오십 보 백보 아니니?

키 얘기하려면 네가 당근과 해야지.

당근이 너보다 훨씬 크고 너보다 날씬해.

너도 당근이 비하면 키 작고 펑퍼짐하다고!

알기나 하니?

근데 너는 왜 남 생긴 걸 가지고 함부로 평가해?"


"그래 그래. 안과 밖이 단단한 애들끼리

잘 지내보셔. 너는 우리 감 가문보다는

당근 가문이 너랑 더 잘 어울리네. 크크크."


아, 혈압 올라!

대봉이랑은 더이상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쟤랑만 이야기하면 속에서 열이 솟구쳐요.

말을 저렇게 밉게만 하는 것도 재주인 것 같아요.

같은 감 가문인 게 짜증 나요.

더 말해봤자 스트레스 받아서 내 속만

물러터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어요.


자연스레 익어가는 것도 아닌,

열받아서 속이 물러버리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래서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열심히 명상을 했답니다.

아삭한 단감으로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렇게 대봉이와는 사이가 나빠진 채로

시간이 흘러갔어요.




주인에게 심한 거부감이 생기게 만든 홍시,

그 홍시가 될 예정인 대봉감.

대봉이는 자신의 자부심과는 달리

그냥 냉장고 구석에 박제된 대봉감일 뿐이었죠.


홍시 때문에 심하게 놀란 주인은

감이라면 종류가 무엇이든 질렸다는 듯이

단감인 나까지 덩달아 방치해버리더라고요.

아,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어요.

왜 하필 방치를 해도 대봉이 옆이냔 말이에요.


곱게 홍시로 변신해가던 대봉이는

자신의 말랑 홍시 길이 가로박힌 것에 대해

너무나 억울해했어요.


왜 자기가 직접 잘못을 한 것도 없는데

자기가 불이익을 당해야 하냐면서

냉장고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아무도 대봉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않았고

안타까워해주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쌤통이라는 분위기였죠.


대봉이가 너무 미웠던 나지만

그렇게 모두에게 외면당하니까

나중에는 좀 불쌍해 보이더라고요.

감이라는 이유로 주인에게 외면당하는 마음을

졸지에 나도 느끼고 있으니 동병상련이었다고 할까.


늦가을에 냉장고에 들어왔는데

한겨울 내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주인의 냉랭함에 비하면,

차라리 냉장고 구석이 덜 시리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다른 과일과 채소들이 냉장고에

몇 번을 들고나는 사이에도

우리만 덩그러니 붙박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답니다.


처음에는 주인의 의도적 외면이었던 거 같은데

4개월이나 구석에 밀어놓고 있는 사이에

이젠 정말로 주인이 대봉이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거 같았어요.



어쩔 수 없이 계속 둘만 붙어 있따 보니

미운 정도 정이라고...정이 들었지뭐예요.


오늘 보니 대봉이가 너무 안쓰러웠어요.

어느새 대봉이가 너무 많이 변했어요.

나보다 꽤 컸는데 대봉이의 키가 줄어있었고요.

고운 홍시가 되었던 대봉이는 이제 없고

쭈그러들고 있는 대봉이만 있었어요.


게다가 인간의 검버섯처럼,

거무튀튀하고 칙칙하게 변해버린 모습은

주홍 빛깔의 고운 옷을 입었던 대봉이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게 변해 있더라고요.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주황색 윤기 좌르르 흐르던 단감이었던 나는

이제 잘 익은 홍시의 단계도 한참 지나

깊게 파이고 쭈글쭈글한 주름이 생긴

감이 되어버렸답니다.


우리가 같이...

냉장고 안에서 변하고 변하다가

이젠 같이 늙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하더라고요.


그때 대봉이가 내게 말했어요.

"단아! 저기 있잖아.

좀 많이 늦었는데 그땐 정말 미안했어.

내가 이렇게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냉장고 구석에서 방치되어 있게 될

감일지도 모르고,

한부로 말했던 거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대봉이 너, 참 일찍도 사과한다!

그래도 우리 완전히 말라붙기 전에

얘기해줘서 그건 고맙네. 하하하."


"사실, 처음에는 내 잘못을 몰랐고,

그다음엔 뭔가 너무 억울했고,

이젠 단이 너한테 제일 미안한거야.

같은 가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때문에 덩달아 너까지 피해를 본거 같아서

정말 너무 미안해.

지금 변해버린 네 모습 보면 마음도 아프고. 흑흑..."


"뭐야? 대봉이 너 우는거야?

쭈글 감이 되더니 철들고 착해졌네.

나 사실 그동안 너때문에

나도 억울하게 방치된 것만 같아서

네가 정말 미웠거든.

근데 나중에는 네가 옆에 같이 있어서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하더라.

나 혼자였으면 너무 외로웠을 거야.

이제라도 사과해줘서 고맙다.

너 그때 건방지지만 않았으면

솔직히 좀 멋지긴 했었어."


"정말?

이제야 그때의 진실을 알게 되는구만.

정작 멋있었을 때는 못 들어본 말을...하하하

그럼 나도 하나 말해주지.

홍시가 되었을 때의 너도 정말 예뻤어.

생각해 보면 나 정말 너무 바보 같았어.

대단할 것도 없는 걸로 뭐 그리 우쭐했었나 몰라.

근데 단아!

우리 이렇게 냉장고 구석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완전히 말라버리게 되면 어쩌지?"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그게 아쉬워.

우리 정말 맛있는 감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말이야. 나 이 구석에서

하나 얻은 게 있어.

어느 순간부터 너는 내 친구였어!

나의 탄력있던 단감 시절부터

말랑이 홍시 시절을 거쳐

쭈글감이 된 지금까지

그 모습을 다 옆에서 봐준 친구는

오직 너 하나뿐이잖아.

그래서 좀 특별해졌지.

원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말이야.

대봉아! 나도 미안해.

네가 너무 미워서 조금 빨리 마음을 열어주지 못한 거."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대봉이를 미워했던 시간들이

녹아서 사라져버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오늘에야 비로소 홀가분해질 수 있었죠.



그때 냉장고 문이 열리고 주인이

대봉이와 나를 제대로 봐주었어요.

무려 4개월 만이에요.


"아휴, 색깔 이상하게 변한 거봐.

이 감들을 어쩌면 좋지?

지금이라도 냉동실에 얼려놓고

아주 조금씩만 아이스크림처럼 먹어 볼까?

그래. 그게 좋겠다."


잔뜩 긴장했던 대봉이와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었어요.


아, 떨리네요.

우리 맛있는 홍시 아이스크림이

될 수 있겠죠?


냉동실은 냉장실보다 훨씬 더 추워지겠지만

대봉이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까지처럼 내 옆에 있어줄 대봉이,

서로의 옆자리가 되어줄 우리일 테니까요.




대봉이와단이는친구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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