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신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끄러운 자태!
만지기만 해도 보드라운 촉감!
보디라인을 말끔히 잡아주는 탄력감!
나의 매력이 이렇게 많다니까요.
가볍지, 따스하지, 옷맵시 매끄럽게 잡아주지
나같이 다양한 매력을 가진 애가
주인의 사랑을 받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요.
이런 나를 어떻게 안 좋아하겠어요?
따스함을 원하는 주인이지만
몸이 둔해지는 것은 싫어하는 주인에게
나는 겨울철 최고의 파트너였어요.
외출하는 주인에게 나는 늘 1순위였거든요.
그래서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기모스타킹이랍니다.
이 집에 몇 개나 있는 기모스타킹 중에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을 보면
아마도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거 말고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늘 외출 우선권을 차지하던 나는
우쭐함이 하늘 높이 치솟곤 했죠.
그렇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나의 잦은 외출이 나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 상상도 못 했었죠.
주인의 외출에 동행한 지 몇 년이 되다 보니
나의 모습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인간에게 찾아온다는 노화가 나에게도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던 거죠.
촘촘하고 탄력 있던 내 몸이 어느 순간
힘없이 늘어져 있었어요.
어르신들의 퍼석해진 피부처럼 내 몸에선
하나둘 보풀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아세요?
발가락들의 압력을 버티는 일이에요.
꽁꽁 얼어붙은 추운 날에는
빙판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가락들이
평소보다 힘을 빡 세게 주는 것 때문에
너무 많이 힘들었어요.
넘어지지 않겠다고 엄청난 힘을 쓰는
엄지발가락의 괴력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니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심했는지 몰라요.
한 번씩 발가락이 세게 힘을 줄 때마다
그 충격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흡수하느라
힘들었던 나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겨버렸지 뭐예요.
바로 스타킹 가문의 수치인
구멍이 뚫리는 일이 내게 찾아왔답니다.
그 약점은 3단계로 나뉘는데요.
엄지발가락의 머리가 살짝 보이는 1단계,
발톱까지도 살짝 드러나 보이는 2단계,
발가락과 발톱이 완전히 구멍을 뚫고 나오는
3단계로 나눌 수 있죠.
나는 이 중에서 3단계에 해당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답니다. 흑흑
나에게 구멍 뚫림이라는 위기가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충격이 컸어요.
다른 스타킹들이 다 뚫려도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던 건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을까요?
앞부분이 뚫린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몸이 전체적으로 쇠약해진 나는
뒤꿈치까지 구멍이 뚫렸답니다.
우리 기모스타킹 가문을 통틀어
앞과 뒤가 같이 뚫리는 대형사고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더욱 자존심이 팍 상하더라고요.
이런 치명적인 일을 당하고 보니
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확 밀려왔어요.
나는 간절히 기도했죠.
이때까지 잘난척한 거 다 잘못했으니
구멍 뚫린 나를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말이에요.
다른 기모스타킹 친구들은 고것 참 쌤통이라며
고소해할 거라 생각하니 더 우울했어요.
그런데요.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어요.
기모스타킹 친구들이 많이 놀랐겠다면서
구멍 뚫린 나를 오히려 위로해 주지 뭐예요.
이렇게 착한 친구들이 옆에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혼자서만 자뻑으로 거만하게 산 건
바로 나였군요.
정말 너무나 어리석었네요.
양말과 스타킹을 돌보는 신께서 나타나시어
내 구멍을 막아주신다면 이제부턴 절대로
잘난척하지 않고 감사하면서 살겠다고
간절히 빌었답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던 며칠 후였어요.
주인이 큰 결심이나 한 듯이 검은 실과 바늘,
가위를 준비하고 나를 옆에 대기시켰죠.
"다른 데는 멀쩡하니까 꿰매서 신어야겠다."
라고 말하더군요.
응? 꿰매서?
아, 잠깐만! 잠깐만요!
나는 바늘 공포증 있단 말이에요.
그 무시무시한 바늘로 나를 찌르겠다고요?
거기다 우리 주인이 바느질 집도하는 것을
내가 믿어도 되는 걸까요?
저 무시무시한 바늘로 나를 콕콕 찔러가며
저 시커먼 실로 내 몸을 관통하게 하는 걸
저 똥손 주인이 과연 해낼 수 있는 걸까요?
바느질 집도는 솜씨 좋은 다른 분께
맡기면 안 될까요?
나, 정말 무섭단 말이에요.
나는 가뜩이나 까만색 스타킹인데
겁에 질려서 더 짙은 흑색으로 바뀔 것만 같은
현기증이 났어요.
내가 너무 무서워하니까
옆에서 구멍 난 곳 없는지
같이 검사받던 다른 기모스타킹들이
나를 안심시키려고 꺼낸 말이 뭐였는지 아세요?
주인이 만들어서 거실에 둔
펠트인형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솜을 넣은 곰인형이랑 토끼 인형을 만들 정도면
바느질을 완전히 못하지는 않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이에요.
음... 그런가?
하긴 나도 그 인형들을 많이 보긴 했죠.
그 정도로만 매끈하게 꿰매준다면
나도 바랄 게 없긴 해요.
아, 그래도 나는 정말 무서웠어요.
그 인형들이야 잘 만들었지만
내 몸의 구멍 막기는 잘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오늘따라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요.
내 스타킹 생에서 바늘과 실은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았단 말이에요.
정말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었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다고
용기를 내기로 했답니다.
요즘같이 물건들을 잘 버리는 세상에
꿰매서 사용해 주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드디어 내 구멍들을 꿰매야 하는 시간이
오고야 말았어요.
콕 찌르는 바늘이 내 몸을 파고들고,
악... 하는 비명소리 한번 공중으로 뱉어내고,
실들은 이쪽저쪽으로 스르륵 바삐 움직이고,
이렇게 3박자의 패턴을 여러 번 거치고서야
나의 구멍들은 다시 채워질 수가 있었지요.
구멍으로 숭숭 들어오던 바람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구멍 막기는 성공한 것 같네요.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어요.
몸이 왜 이렇게 불편한 거죠?
내 몸이 매끄럽지가 않고 뭔가 부자연스럽게
당겨진 것만 같은 이 불편함은 뭔가요?
바늘에 콕콕 찔린 부작용 같은 건가.
나는 계속 어리둥절한 상태인데,
주인은 스스로의 작업이 만족스러운지
다 꿰맸다면서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었답니다.
나는 사진을 보다 놀라서 기절할 뻔했어요.
펠트 인형도 만든 적이 있다기에
아주 조금은 기대했단 말이에요.
똥손 제대로 인증하는 것도 아니고
울퉁불퉁 쭈글쭈글 이게 뭐냐고요.
내가 한 미모 하던 기모스타킹이었는데
이렇게 흉을 크게 만들어놓으면 어쩝니까요.
성형수술 실패한 인간들의 마음이
지금의 나처럼 슬플 거 같아요. 엉엉...
구멍 꿰매서 다시 예뻐지고 싶었는데
오히려 이렇게 미워져서 우리 주인이 나를
두 번 다시 안 신어주면 어떡해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만큼이나 슬플 거 같아요.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꿰맨 자국을 보면 다시 우울했어요.
이게 뭐야! 보면 볼수록 이상해요.
다시 성형바느질 해주세요...!!!
너무 슬프고 우울해서 감정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데
나를 신어본 주인이 그러는 거예요.
"오~ 구멍 막았더니 정말 멀쩡해졌네.
걸을 때 울퉁불퉁할까 봐 걱정했는데
신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잖아.
아주 좋았어!"
어? 이런 내가 괜찮다고요?
나 이렇게 울퉁불퉁 못생긴 바느질 자국이
생겼는데도 괜찮은 거 정말 맞아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찬찬히 다시 한번
꿰맨 자국을 살펴보았어요.
너무 솜씨가 없다고 생각했고
꿰맨 자국이 흉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쭈글쭈글하던 부분에 주인의 발이 들어오니까
쫙 펴지면서 그렇게까지 이상하진 않더라고요.
무엇보다도 주인이 웃고 있었어요.
구멍이 막아졌고 다시 신을 수 있게 됐으니
그걸로 됐다면서 말이에요.
그걸 보는 순간 그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기 시작했어요.
잘 나간다고 혼자서만 뭐라도 된 듯
잘난척했던 지난날,
구멍 뚫렸다고 세상이 끝난 듯이
절망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그 순간,
울퉁불퉁 기대 이하의 바느질에 마음 상해서
또다시 고개를 들던 불평불만의 못난 마음들....
구멍이 뚫렸고 꿰매서 흉이 생겼어도
활동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나는 여전히 쓸모 있는 기모스타킹임을
제대로 확인받는 기분이었어요.
주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말이에요.
나는 처음으로 행복했어요.
주인이 내게 말했거든요.
"역시 너는 참 따뜻해."
나는 우리 주인에게 따뜻한 기모스타킹이면
그것으로 충분한 존재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어요.
바느질의 고통을 참아내길 잘했어요.
이렇게 행복한 오늘을 맞게 됐으니까요.
엄지발가락도 뒤꿈치도 내 품에서
따스하게 잘 지내고 있음을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좋아요.
내가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고
만족하는 주인의 미소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한 오늘을 살고 있어요.
.
.
참,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이 하나 있는데요.
글쎄 주인이 나만 특별히 사랑해서
자주 선택해 준 것이 아니었다지 뭡니까.
아무거나 먼저 손에 잡히는 걸 신었을 뿐인데
나 혼자 착각했던 거였지 뭐예요.
나 참!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