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그린아파트 24동 앞에 있는 화단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가 서있어요.
내가 바로 그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랍니다.
나는 대추로서의 내 삶보다도
24동 베란다를 통해 보이는 인간들의 삶을
구경하는 게 더 좋았어요.
우리 대추들이 다 고만고만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른 것처럼,
인간들도 층마다 똑같은 구조의 집에 살면서도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죠.
나무에 매달린 채 한정된 생활을 하는
우리 대추들에 비하면, 인간들의 삶은
참 활기차고 다양했어요.
내가 날마다 제일 재밌게 구경하는 집은
104호에 사는 인간이에요.
베란다 창을 활짝 열고 있어 잘 보이거든요.
인간들은 참 좋겠어요.
TV라는 재밌는 것도 보더라고요.
내가 나무에 매달려 있지만 않았다면
저 집에 데굴데굴 굴러 들어가서 같이 재밌고 싶었죠.
인간의 움직이는 삶이 부러운 나에게는
대추로서의 삶은 별로 재미가 없네요.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기에, 가지에 매달려 있는
구속된 삶이 너무 싫어요.
햇볕이 쨍쨍 내리쬐다 못해 내 몸속 씨까지
다 태워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날에도
계속 매달려 있는 거 너무 힘들어요.
하루 종일 비라도 오면 그 비가 그칠 때까지
계속 젖어있어야만 하는 상태도 싫어요.
비도 적당히 맞아야 시원한 거지 온종일 계속
비만 맞아봐요.
나중에는 빗줄기에 두드려 맞는 것처럼
피부가 아프다니까요.
아, 그래도 하나 좋은 게 생각나긴 하네요.
바람이 솔솔 부는 날이면 이파리들이 살랑살랑
춤을 출 때가 있거든요.
이파리들이 춤추듯 움직일 때마다
풋풋한 풀내음 같은 향기가 내 코끝에 닿으면서
주변에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요.
그럴 때가 나무에 매달린 대추로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어요.
내가 좋아했던 날은 딱 그거 하나고,
나머지는 언제 이 나무에서 탈출하나
그것만 생각하면서 지냈답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대추인데
이렇게 나무에 묶여 있는 삶이 정말 갑갑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이 나무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 대추들에게 다가올 변화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지금의 내 색깔이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
풋풋하고 싱그러운 색깔인 연두색 말이에요.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온몸이
붉게 변한다지 뭐예요.
붉어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수분이 다 빠져나가서 몸이 쪼글쪼글해진다잖아요.
그게 너무 싫어요.
물론 인간들도 나이 들면 쪼글쪼글하게
변하기는 하더라고요.
그래도 인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걸어 다닐 수 있잖아요. 빨리 못 걷는다 해도
천천히라도 이동이 가능은 하니까요.
나는 이렇게 나무에만 매달려 있다가
쪼글쪼글 대추가 되어버리가 너무 싫었어요.
아직 예쁜 연두 대추일 때 나무를 벗어나서
다른 재미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나무를 벗어날 수 있을지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이었어요.
같은 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던 이파리 하나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거예요.
하필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어요.
"이파리야! 너 괜찮니?"
"대추야, 나는 괜찮아. 하나도 안 다쳤어."
다행히 이파리는 몸이 가벼워서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다치지도 않고 멀쩡했어요.
이파리가 떨어진 곳은 24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계단이었죠.
나는 또 물었어요.
"이파리야, 바닥은 어때? 너무 딱딱하지?"
"응. 딱딱한데 시원하기도 해.
나무에서는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답답했는데
바닥이 넓기는 하다."
"그래? 그럼 나도 너한테로 갈까? 조금만 기다려."
"안돼! 대추야, 절대 그러지 마.
나는 이미 떨어졌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너는 안전하게 나무에서 계속 버티면 좋겠어."
이파리는 말렸지만 나는 빨리 나무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나는 틈날 때마다 몸을 흔들어보았지만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어요.
내 가지는 왜 이렇게 튼튼하고 난리람.
내가 바닥으로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옆에서 보던 다른 대추들도 말리더라고요.
뭐 하러 안전한 나무를 두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하냐면서 한 마디씩 했지요.
나는 대추이면서도 다른 대추들과는
대화가 잘 안 통하고, 이파리들과 더 잘 통했어요.
제일 친했던 이파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이파리 친구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바닥으로 떨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늘은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어요.
바람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어쩌면 이파리에게
갈 수 있을 거 같아서 뭔가 더 힘을 내고 싶었죠.
"으라차차차차... 제발 떨어지자....
나는 쪼글 대추가 되기 전에 빨리 나무 밖 세상을
보고 싶단 말이야. 제발...."
바람이 내 말을 들었는지 나를 툭 밀어주었고
드디어 난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게 됐어요.
바람이 많이 불어서 하마터면 다른 쪽으로
잘못 떨어질 뻔했지만 무사히 계단에 떨어졌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먼저 계단에 떨어져 있던 이파리들이
바람 때문에 슈웅 다른 쪽으로
날아가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내 친구 이파리도 같이 말이에요.
"아... 안돼... 이파리야. 멀리 날아가지 마!"
"대추야.... 대추야...."
그렇게 우리는 만나자마자 이별했어요.
내 친구 이파리는 어디까지 날아간 걸까요.
이파리는 몸이 가벼워서 떨어질 때도
사뿐히 날아서 바닥에 도착했는데,
나는 더 무거워서인지 바닥에 떨어질 때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기절을 했던가 봅니다.
눈을 떠보니까 나는 계단 위에 누워있었어요.
내 친구들은 다 날아가 버려 아무도 없고
나무에선 다른 대추들이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죠.
나무에서 탈출하면 되게 넓은 세상을
구경하게 될 줄 알았거든요.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내 상상과는 달리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더 재미가 없어요.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베란다 창으로
인간들 사는 거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바닥에 떨어지고 나니까 전보다 아쉬운 일만 생겼어요.
베란다로 보이던 tv도 볼 수 없었고,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해는 더 뜨거워졌고,
가장 결정적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인간들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밟혀서 터지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어요.
나무 밖,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이젠 누구 발에 밟히기라도 할까 봐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게 참 우울했어요.
그래서 데굴데굴 굴러보았어요.
인간들의 발에 밟히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계단 끝 쪽으로 굴러갔죠.
중심부를 벗어나 끝에라도 가 있어야
터져 죽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더 재밌는 세상을 꿈꾸면서
나무에서 떨어지고 싶었던 건데
막상 떨어지고 난 세상은 더 외롭기만 해요.
나무에 매달려서 봤을 때는
인간들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바닥에 떨어져서 볼 때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하니까
인간들이 움직일 때마다 너무 거대해 보여서 무서웠어요.
이건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이란 말이에요.
쪼글이 대추 되기도 전에 밟혀서 터지는
대추가 될까 봐 걱정할 줄은 몰랐어요.
계단 밑에는 차들도 자주 다니고,
자전거에 오토바이까지 다녀서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어요.
데굴데굴 잘못 굴러서 계단 밑으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구르기 힘조절 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자유를 찾아서 나무에서 탈출했는데
재미는 없고 조심할 것만 많아졌어요.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삶인데도 불구하고
딱딱한 계단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내가 얼마나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살았었구나 하고 생각했죠.
막상 잃어보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를 알 것 같아요.
이제 내 소원은 나에게 허락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히 보내야겠다는 거예요.
이미 엎질러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잖아요.
후회만 하다가 허무하게 밟혀버리는
그런 일만 없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계단 위에 누워 있으니까 좋은 것도 있긴 해요.
나무에 붙어 있을 때보다 나 혼자 누워 있는
계단이 넓어서 편한 건 있네요.
데굴데굴 굴러보면서 넓어진 공간을
느껴보기도 했어요.
그래도 나무라는 안전장치가 사라졌다는 건
자꾸만 불안감이 커진다는 단점이 있더라고요.
계단은 인간의 발 때문에 위험하니
화단에라도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내가 쪼글이 대추로 말라버리기 전에,
풀이랑 꽃이랑 나무랑 얘기라도 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화단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화단 쪽으로 굴러가려고 애써봤지만
계단의 턱이 너무 높아서 화단 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주세요.
내 기도를 누군가 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긴긴 하루가 지났어요.
외출을 했다 돌아오던 24동의 주민인가 봐요.
계단에서 나를 발견한 그녀가 말했어요.
"어머, 대추 한 알이 떨어져 있네.
어떻게 딱 한 개만 떨어져 있냐."
저기요.
나 좀 저기 화단에다 놓아주면 안 돼요?
"대추야, 너 아무래도 바람 불던 날에
떨어진 거 같은데, 괜히 밟혀버리지 말고
차라리 화단에라도 들어가서 지낼래?"
네! 좋아요. 제발요!
아, 나의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요?
그녀는 나를 들어서 화단에다 놓아주었어요.
야호 신난다! 나는 이제 흙으로 돌아왔어요.
비록 나무에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푹신하고 촉촉한 흙 위에 있으니까
훨씬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네요.
혼자 계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보다
풀들이랑 들꽃이랑 인사도 나누면서 지내니까
외롭지 않아서 좋아요.
이제 나는 쪼글쪼글 대추가 되기 전까지
내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잘 지낼 거예요.
남의 것만 부러워하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건지 모르고 살면
나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답니다.
그러니 언제나 기억하자고요.
내가 있는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기로!